할말있어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에 대한 사실은 왜곡되었을까

해동의 증자, 삼천궁녀를 거느린 호색한? 그에 대한 사실은?


의자왕 그는 누구였을까? 그는 백제 30대왕이었던 무왕의 맏아들로, 백제의 31대왕 즉,마지막 왕이었다.


백제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해동의 증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형제에 대한 우애가 매우 깊으며,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추어 대하면서 서로간의 관계도 매우 좋아 귀족이나 왕족 모두에게 흠잡을 데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초기, 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왕위에 오른 그 이듬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동생들을 섬으로 추방시키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정말 죽을 죄가 아니라면 용서해주는 등 민심도 안정시켰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힘을 합쳐 신라를 압박하고, 당에도 조공을 바치며, 왜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한, 전쟁에서도 연이은 승전고를 울렸는데, 백제의 영토를 침략하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결론적으로는,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춘추(후에 무열왕 즉위)의 딸인 고타소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신라가 백제 멸망에 큰 힘을 싣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집권 15년 후부터 그에 대한 기록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태자궁을 수리하면서 엄청난 사치를 부리고,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며 술도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 이때쯤, 궁중에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기록들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법, 신라가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유들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의자왕 즉위 15년 이후의 기록들과 그때 상황에 대한 묘사들은 각색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점도 든다. 반대로, 어쩌면 신라에서는 이럴 상황을 예측하고, 기다리다가 민심이 변화할 때를 찾아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는, 즉 의자왕에 대한 기록들이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의 왕권강화에 귀족층들이 반발하고 이로 인해 백제 지배층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하고, 성충이 투옥되고, 좌평 흥수가 귀양간 것이 모두 그 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이러한 백제 의자왕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신라가 정보를 왜곡하였다고, 의자왕이 실제로 호색한이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우리가 그때 당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사고로 객관적인 사실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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