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지의 영화칼럼 3] 숨막히는 현실을 감내하는 과정

스릴러일수만은 없는, 그러나 스릴러여야만 하는 영화

영화관에 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평소 앉던 의자보다 조금은 푹신한 그 위에 앉아 우리는 각자의 기대를 깜깜해지는 조명 아래에 뿌린다. 기대가 충족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상황으로부터 오는 감정은 온전히 관객의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일은 만원 내고 다른 이의 꿈 속에 들어가는 행위일 지도 모른다. 짧게는 90분, 길게는 140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스크린 속 세상을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와 동시에 팝콘을 씹으며 화면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각한다. 그 지점에서 관객은 상당히 관조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스스로의 인생조차 관조할 여유가 없던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숨쉴 틈이 확보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영화관 문을 나오는 길에 긴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듯 하다. 일종의 자각몽을 꾸고 난 기분이다.



고전 누아르 영화의 느낌을 풍기는 “셔터 아일랜드”는 꿈에서 깨어야만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테디는 현실과 환영 사이에 놓인 인물이다. 영화적 분위기만 보면 단순히 기괴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설정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테디’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파트너 ‘척’ 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가 처음 섬에 도착해서 정신병원 정문으로 차를 타고 들어오는 장면에서 알 수 없는 묘한 ‘평범함’을 먼저 지각한 이가 있다면 이 영화의 스릴러적 매력은 기본적인 배경설정뿐 아니라 복합적 요소로부터 탄생한 일종의 교향곡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장면이 배 위에서 시작하는 만큼 이 작품은 눈에 띄게 의도적인 폐쇄성을 보이고 있다. ‘섬’이라는 설정 그리고 그곳의 유일한 탈출구인 선착장과 배편이 우리가 적이라고 믿는 그들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면서 관객들이 주인공의 미련함에 탄식하게 만든다.



클래식 음악이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이에 어울리는 고전적 질감의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과 함께 병원 안으로 한 발짝씩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섬에 위치한 정신병원의 오묘한 색채를 뚜렷하게 느낀다. 바로 그 때 주인공만큼이나 관객들은 거부하기 어려운 환각에 빠져들게 된다. 누가 환자인가를 묻는 이는 없다. 다만 우리는 언제쯤 진실이 밝혀질 지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조작된 기대를 품을 뿐이다.




자신의 의지를 한껏 표출하는 주인공에게 설득 당하는 것 또한 한 순간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환각에 시달릴 때마다 관객 또한 계속해서 질문을 받는다. ‘한번 깨어나 보겠는가?’ 하지만 이미 관객들은 주인공을 스스로와 동일시하게 된 지 오래다. 급기야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의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섬 여기저기를 테디에게 끌려다니던 척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괜한 회의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게다가 병원 관계자들이 제약을 가함에 따라 수사에 진전이 없자 영화를 관통하던 ‘탈출한 환자에 대한 수사’라는 목적마저 약화된다. 설상가상으로 어둡고 침침한 날씨가 계속될수록 탈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또한 극도로 증폭되기에 이른다. 음침한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테디의 몽중몽을 스크린 위에 띄우자 관객들은 어디까지가 액자 안이고 어디서부터가 액자 밖인지 혼란을 겪게 된다.



수많은 장치에 발 걸려 넘어진 관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영화가 중반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테디가 67번째 환자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테디가 그토록 간절하게 찾던 레디스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다가 ‘Rule of 4(4의 규칙)’이라는 쪽지의 첫 번째 단서를 잊고 또다시 우리는 테디와 함께 환영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테디의 환영은 영화의 전개 흐름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긴 시간 동안의 추리가 다소 고통스러워질 때쯤 과거를 되짚는 것이 이 영화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기에 환영 속의 과거 회상 장면들은 굴곡진 스토리에 휴식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공포스럽지만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장면들’은 제한된 공간의 단조로움에 지친 관객들을 무사히 결말까지 끌고 가는 데 한 몫 했다. 불타는 집 안에서 테디가 아내를 껴안고 울부짖는 장면에서는 불타고 남은 재가 꽃가루처럼 날리고 삭막한 정신병원과는 상반되게 영롱한 색감이 눈에 띄는 영상미를 보여준다. 미스터리 스릴러라기보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했던 무수한 멜로 영화의 일부분을 떠올리게 만드는 연출이다.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증명된 스토리를 가졌기에 연출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질 수 있었던 이 영화는 관객에게 급작스럽게 현실을 내던져 준 뒤 순간적으로 놀라게 하려는 저급한 의도를 품고 있진 않다. 그래서 우리는 서서히 잠에서 깨듯이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 작품의 반전이 우리에게 무미건조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급박한 속도로 전진해오지도 않는다. 등대로 달려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숨을 헐떡이며 맨 꼭대기 층의 문을 열기 직전까지 숨 쉴 틈 없이 달리던 이 영화는 문이 열리자마자 반전의 요소를 하나씩 차근차근 짚어 가며 우리가 인과관계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서행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온화한 미소를 품은 벤 킹슬리의 강경하면서도 진중한 태도가 촉발시킨 합리적 의심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주인공 테디와 관객들은 거의 동시에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현실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흥미롭게도 팝콘을 씹던 우리는 주인공보다 약간은 빠른 속도로 현실을 흡수해 나간다. 거기서 우리의 이성적 사고는 잠시 숨을 고르고 영화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환영 장면들을 빠르게 복기하면서 인물의 내면을 포장하고 있던 스릴러라는 장르적 껍데기를 벗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오싹하면서도 쓰라린 감정적 울림을 느낀다. 그리고 햇살이 내리치는 병원 앞뜰의 계단에 앉아 청명한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 삶을 향해 나아가는 레디스의 뒷모습을 본다. 결국 더 이상 괴물로 살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선택을 이해하게 된 우리도 천천히 꿈에서 깨어나 영화관 밖의 현실 속으로 발을 옮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스터리 반전 스릴러’라는 듣기조차 진부한 라벨을 떼어내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이 작품의 섬세함 속에 감춰진 진가를 볼 수 있게 된다.




칼럼 소개 : 간과할 수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 날카롭게 분석하여 영화 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영화의 일상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독특한 발상으로 비상식적 접근을 시도하여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파헤쳐 본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