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의 인문학칼럼 7] 중국 항일유적 탐방기 제 1장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안중근이 밝힌 이토의 15가지 죄 (여순감옥, 관동법원)

 

 
뒤에 있는 빨간 손은 나라사랑을 실천했던 과거의 손(안중근 의사)이고, 파란색 손은 나라사랑을 실천할 현재 우리의 손을 상징한다. 이는 나라사랑을 실천했던 과거의 손과 나라사랑을 실천할 지금의 손이 하나 되어 미래로 향하는 나라사랑의 다짐을 표현한 것이다. 
 
‘나라사랑체험’은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현장에서 왜곡된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지키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그 시작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독립에 대한 맹세를 다짐하신 안중근 의사이다.
 
우리에겐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역사가 불과 약 100년 전에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 하의 식민 통치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을까? 모 언론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3·1절을 삼점일절 이라고 읽는 충격적인 사례가 있었다. 청소년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독립운동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나라사랑체험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청소년대표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나라정신을 고취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중국의 항일유적지에서 독립운동가 분들의 흔적을 탐방했다. 그 시작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독립에 대한 맹세를 다짐하신 안중근 의사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을 애국지사라고 부르며, 돌아가신 애국지사를 순국선열이라 부른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이후, 관동법원으로 이송되어 1910년 2월 14일 본법원 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관동법원에서 안중근 의사는 6차례의 공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토의 15가지 죄를 명명백백히 밝힌다.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넷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다섯째, 대한제국의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림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여덟째,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아홉째, 한국인들의 교육을 방해한 죄 
열째,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열하나, 국어, 역사책 등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열둘.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열셋.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이는 죄 
열넷.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한 죄 
열다섯. 일본 천황(메이지 천황) 폐하의 아버지인 태황제(고메이 천황)를 시해한 죄.

 

 

안중근 의사에게 거꾸로 심판받는 상황이었다. 그를 재판했던 재판관 중 한 명이었던 야스오카 검찰관은 어쩔 수 없이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그를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 가족들에게까지 그를 존경하라고 얘기했다. 당시 안중근 의사가 발언한 내용은 관동법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로 너무나도 정확하고 증거가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모든 재판관이 일본인이었고, 안중근 의사의 재판 결과 여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 소식에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편지를 보낸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내가 조마리아 여사였다면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이런 짧고도 단호한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안중근 의사의 뒤에는 항상 조마리아 여사가 있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아들에게 당당히 죽으라고 말하는 조마리아 여사가 있었기에 안중근 의사가 있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관동법원과 함께 기억해야 할 장소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위치한 여순감옥(뤼순감옥)이다. 이곳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던 장소이다. 작은 방에서 화장실도 따로 없이 6~7명이 생활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딱딱하고 차가운 방바닥에서 지내야했다. 감옥 안에서 이름도 없이 수감번호로 불리며 사는 기분은 어땠을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감번호로 불려야만 했던 순국선열 분들을 잊지 않고, 다시금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역할이 아닐까.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감옥규모로 확장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전하면서 중국은 한동안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하였으며 약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1906년~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감옥 안에서 처형당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때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

 

▲ 안중근 의사의 사형 장소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말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과거의 역사를 잊은 민족이 어떻게 앞으로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희생이 따른 독립의 역사가 있었기에, 현재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대한민국의 국민이 잊는다면 누가 기억할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다시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인식과 나라사랑정신이 필요하다.

 

 

 

진정한 나라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되새겨보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들과 같지만, 지금 우리는 안중근 의사처럼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 없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처럼 도시락 폭탄을 던질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아픈 역사와 이 아픈 역사에서 독립이라는 희망을 이루게 해주신 분들을 기억할 수 있다. 항상 가슴 속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주신 분들을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사랑이 아닐까.

 

 

칼럼 소개: 사회의 현실, 문제점, 소식들을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전달하는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은 학생입니다. 학생의 시각에서 인문학을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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