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수의 영화칼럼 2] 리차드 링클레이터, 시간과 흐름에 대한 집요한 고집

<보이후드>와 비포시리즈로 살펴보는 링클레이터의 남다른 선택에 대하여

 

주류영화들, 흔히 말해 우리가 쉽게 접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대부분 고전적인 서사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전적 내러티브에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인 프로타고니스트 그와 대척점에 있는 안타고니스트가 서로 갈등하고 결국 주인공이 목표를 성취하는지 미성취하는지 결론 맺는 형식을 취합니다

 

대부분의 주류 영화들은 주인공과 반대자의 갈등 즉 사건에 집중하고 이외에 것들은 생략합니다. 예컨대, <어벤져스>는 외계인과 싸우는 장면보다 밥을 먹는다거나 서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 장면을 많이 그려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소개할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오히려 밥 먹고 농담 따먹는 장면에 집중합니다. 즉 주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주변의 이야기에 초점 맞춰 극을 진행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어려울 수 있으니 그의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그를 스타감독의 반열로 올려놓은 비포 시리즈부터 살펴봅시다. <비포 선라이즈>는 기차에서 두 남녀가 만나 해뜨기 전까지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차기작 <비포 선셋><비포 미드나잇> 역시 각각 비행기가 떠나기까지의 약 1시간 정도의 시간과 그리스 여행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시간을 다루고 있죠

 

다시 말해 감독의 모든 영화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은 시간의 흐름, 어느 한 순간의 포작이란 것입니다. 시리즈가 진행됨에 따라 배우들은 9년마다 늙어가고 그 시간은 고스란히 그들의 얼굴에 드러납니다. 관객들은 현실에서 이 배우들이 늙어감을 알고 있고, 그것이 영화로 드러날 때, 특수효과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축적을 고스란히 느끼게 됩니다.

 

 

영화 <보이후드>는 조금 더 실험적입니다. 비포시리즈가 시간의 축적속에서 그 순간을 다뤘다면, 이 영화는 그 순간들이 이어지는 흐름 즉, ‘시간의 흐름을 다룹니다. 감독은 이를 위해서 12년간 매년 15분씩 촬영하는 모험을 합니다. 이전에도 이러한 시도는 이뤄졌고, 다큐 장르에서는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극영화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초의 성공사례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영화에서 시간의 초점은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다른 영화라면 생략할 시간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그 여분의 시간을 풍부한 대화로 채웁니다. “나는 영화의 사건이나 그것을 이루고 있는 풍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에 집중합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역사를 드러내길 좋아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서사방식은 등장인물이 어떻게 지금 관객 옆에 함께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만들까에 매진합니다.

 

 

다시 <보이후드>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보이후드>는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삶 전체를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감독은 그의 여정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보여줍니다. 여느 다른 성장영화도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대로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죠. 그렇다면 그 영화들과 <보이후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 이 글의 서두에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기억이 구성되는 방식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대부분의 내러티브 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명확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던 부분을 기억하시나요? 굵은 줄기의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기 위해선 생략이 불가피 하고 그 빈자리가 티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분명한 인과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그 모든 인과관계를 기억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않는다'라고 하기보다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실은 우리 삶의 모든 일이 인과관계에 따라 발생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세계의 시각으로 보자면 인과관계를 삶을 연결 짓는 도구로 인식하는 것은 꽤 억지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보이후드>는 시간의 흐름 자체에 집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후드>에서는 부모의 이혼, 새아빠의 폭력 폭정 같은 굵은 사건 장면은 빠져도 매일 아침 투닥거리는 남매의 모습과 미식축구 장면을 찍어오라는 숙제를 받고도 그 주변의 풍경을 담는 메이슨이 그리고 오랜만에 만날 때면 항상 머쩍게 농담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존재해야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결말 부분, 링클레이터는 12년의 막을 내리면서 메이슨을 이렇게 그려냅니다. 메이슨은 새로 사귄 룸메이트와 언덕 위에서 져가는 해를 바라봅니다. 이때 관객들은 12년간 함께 해 온 메이슨이라는 친구의 삶도 끝나는 구나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끝맺지 않습니다

 

져가는 해를 바라보던 메이슨과 룸메이트는 서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새로운 사랑에 빠진 듯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 새로운 일이 발생할 듯한 여지를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렇기에 그 둘이 만난 마지막 만남은 삶의 마지막 즉 영화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 영화의 시작을 의미하고 아직 메이슨의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링클레이터의 유명한 일화를 전하며 글을 마무리 하려합니다. 2011년 여름, 텍사스를 포위한 산불이 발생합니다. 1천 여채가 넘는 주택이 불에 탔고 일클레이터 감독의 집도 불을 피할 수는 없엇죠. 그 화재에 의해 수많은 시나리오와 제작노트들이 불에 타서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보이후드에 대한 몇몇 기록들과 앞으로의 진행에 대한 아이디어 역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6살 소년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의 12년의 이야기를 매년 15분씩 카메라에 담기로 한 이 무모한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 같았습니다. 한 기자는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한 것 아닌가요?” 그 때 감독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이런 게 인생이지.”라고.

 

칼럼소개:  영화를 읽어내려갈 때 감독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감독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정수의 영화칼럼]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특히 감독에게 집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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