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이윤 추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 그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풍족하게 생산되고 공급될 것이며, 그 덕분에 우리 모두의 경제생활이 풍족해질 거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를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긴 후 멀리서 시장의 역동을 지켜보기만 하거나 가끔 수정을 가하는 경우가 있어도 대체로 그것을 믿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계속 어려우며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도 끊임없이 내적 결핍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여전히 가난이 존재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경제생활에 숨이 막혀 자아실현에 어려움을 겪는다. 의문이 든다. 이렇게 필요한 게 많은데 이윤추구의 힘은 왜 믿음에 대한축복을 아낄까. 그 힘에 생산을 일임하면 진정 사회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사실인데,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말 그대로 오직이윤이므로,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써 이들에게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윤 창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언가가 필요해도 기업이 그것에서 수익을 창출할가능성을 보지 못한다면 생산되지 않는다. 무
장마가 지나갔다. 개인적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극도로 습한 날씨에서 벗어났는데 누군들 안 그럴까. 하지만 아직 여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운 길을 걷다 상점 옆을 지나고, 그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냉기에 흠칫하는 일상을 여전히 보내고 있다. 난 이상하게 극도의 더위와 추울 정도의 냉기가 1초 사이 교차하는 그 순간의 묘하면서도 뚜렷한 이질감에 계속 흠칫하게 된다. 그 이질감은 학교에서 가장 심하다. 친구들이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놓는다. 그래서 심심찮게 추위 떠는 자가 발생하지만 덥다는 친구들이 항상 우세하기 때문에 최저 온도인 18도 목표치는 관철된다. 문제는 융통성도 없이 계속 18도로 간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공기의 질이 바뀌었다면 다시 설정 온도를 높여야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인데도 말이다. 결과는 상당히 기괴하다. 복도는 푹푹 찌는 반면 교실 안은 차가워 창문에 김이 뿌옇게 끼고 이슬도 맺히는 그 모습이 마치 마트의 냉동고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커다란 냉동고 안에서 설인들이 뛰어다니는 형국이다. 이건 분명 사치다. 에어컨 사용의 일반적인 명분을 넘어선 이러한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가 봤을 때 이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기
얼마 전에 지방선거가 있었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으나 내가 사는 군포에서는 기권표가 많이 나왔다. 투표용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투표함에 넣음으로써 정치판에 항의한 사람이 많았다는 의미다. 후보나 정당을 찍지 않고서도 유권자들은 어떻게든 자기 의사와 존재감을 표출한다. 재밌는 점이다. 다만, 그것도 투표를 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투표할 수 없다면 높은음이든 낮은음이든 악다구니든 그 어떤 소리도 낼 수 없다. 어떤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엔 투표소가 절벽 위에 있어서 암벽등반을 해야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열심히 올라가서 투표소로 향하는 중에는 나무뿌리가 땅 위로 뻗어있어서 계속 발이 걸려 넘어지고, 겨우 입구까지 다다라도 웬 허들이 있어서 점프해야만 지나갈 수 있단다. 격한 몸놀림 후엔 항상 배에 신호가 온다. 화장실로 향하지만, 앞에 있는 것은 그 입구를 가로막은 바위다. 철인 3종 선수도 절망에빠질 것이다. 물론 이딴 투표소는 없다. 다수에게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많은 투표소가 저 미친 마을의 그것과다를 게 없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다. 제20대 대선이 있었을 때 광주광역시의 전체 23개의 투표소 중 16개가 장애인 차별적 요소를 지니
기후 위기가 이슈다. 그냥 ‘평범한 이슈’라고 한다면 푸대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이슈 위에 있는 이슈다. 인류 역사를 한 판의 게임으로 비유한다면 최종 보스라고 할 만한 기후 위기의 등장에 우리는 대충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리 다 죽는단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평소대로 살다가 죽을래’와 ‘우리 다 죽는단다. 뭐라도 하자’가 그것이다. 이 둘은 상이하지만, 공통점 또한 있으니둘 다 미온적인 태도를 낳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아무리 봐도 임종 직전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상이변들을 아무리 봐도 초강력 펀치라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어컨과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면서 전혀 문제없이 평범한 일상을 잘 보내고 있다. 또 다른 면은 절멸이라는 언어가 지닌 개인성에 있다. ‘우리 다 죽는다’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부각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것에 포함된 ‘나’다. 나의 죽음은 나의 소관이다. 내가 죽는 건 내 맘이다. 따라서 절멸이라는 언어에는 체념의 자유가 반드시 따라붙고, 기후 위기에 대한 행동을 개인 선택의 영역으로 격하시킨다. 결국 ‘다 죽는다’라는 깃발로는 많은 사람을
내가 나온 초등학교는 참 좋은 학교였다. 선생님들이 아주 친절하셨고 병설유치원 유리창을 맞혀도 마음껏 축구 할 수 있었으며, 뒤는산이고 앞은 논밭이어서 자연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친구들 사이에 그 어떤 격과 장애물도없었다.다른건 내 모교의 특성이라 쳐도 이 마지막 대목은사실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백충'이라는 말이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월급이 200백만원 언저리인 아버지를 둔 아이를 비하하는 표현인 '이백충'이란 단어가 그 어린 입들에서 뱉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1 같이 신나게 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서로 급을 나눈다는 것. 분명 이것은 우리사회가 신분사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조선의 신분사회는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졌지만 21세기 한국에는 다른 성격의 신분사회가 들어섰다고 보여진다. 이런 역사적 비극의 연출자는 내가 봤을 때 '경제성장지상주의'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효용을 늘리는 것에 크게 집중한다. 효용은 재화나 서비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데, 그 크기는 우리들이 상품에 기꺼이 내고자 하는 돈의 액수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
특성화고에 온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다. 나머지 반년이 지나면 학교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때쯤이면 앞으로의 중장기적인 로드맵이 있어야 할 터지만, 나에겐 없다. 그래서 저 울타리 밖의 풍경은 안개가 쫙 깔린 풍경으로 다가오는데, 보기에 여간 우울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울타리 안쪽에 시선을 두는 것이 마음 편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 점점이 박혀 있는 2년간의 기억들 속에서 그 어떤 유의미한 것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진로를 위해서 도대체 뭘 했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현기증이 나서 시선을 그저 허공에 둘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 같은 반 아이들 몇 명이 밟혔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 때문이다. 학업에 열의가 없고 진로를 위한 노력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로라는 청사진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이다. 수업 시간에 자거나 멍때리거나 딴짓한다는 공통점이다. 이 아이들은 평소에는 활기찬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한 이들이 학업과 진로 설계에는 열의가 없는 것이다. 왜일까. 물론 의지를 갖지 않는 개인에게 50%나 70%, 혹은 99%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1%라도 사회가 그것에 대해 자유롭지 않다면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