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한복을 입는 사람보다는 양복을 입는 사람이 더 많이 보인다. 학생들의 교복도 한복보다는 정장에 가까운 모습이다. 건물도 마찬가지이다. 늘어진 처마와 나무 기둥 대신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만이 수두룩 빽빽하다. 거리의 간판에서는 한글보다는 영어와 영단어를 찾기 편하다. 우리는 전통을 찾아볼 수 없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 전통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익힐 전통이 없다. 학교 수업 시간에서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전통이다. 늘 중요하다 말하는 '우리의 것'이지만 정작 배우고 가르치며 보존하는 이는 어디 있는 걸까? 이른바 '왕릉 뷰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한 번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작년 9월, 세계문화유산인 김포 장릉 인근에 아파트를 짓는 황당무계한 사건이다. 건설사 세 곳은 문화재청의 허가 없이 관할 지자체의 허가를 받고서 아파트를 올렸다. 상호 간 고발전까지 이어졌지만 결론은 인천 서구청 허가에 아파트 입주가 시작됐다. 참담했다. '세계문화유산'인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다. 아파트 건설 중지를 바라는 시민들의 청원이 올라가고 2
스마트폰의 보편화와 영상 매체의 발전으로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화려한 영상과 신나는 음악, 간결한 자막은 간편하게 한 손으로 세상 모든 것을 보는듯한 기분을 들게 하니까. 심지어 요즘은 일명 '쇼츠 영상' 이라 불리는 짧은 영상도 많이 생산된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이것들을 놓을 수가 없게 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방금 전까지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다 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란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이런 영상 매체는 곧 청소년들을 난독증과 빈어증으로 이끌기도 한다. 난독증은 쉽게 말해 글을 이해 못 하는 증상, 빈어증은 언어가 부족한 증상이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고 문장들을 자주 접하지 않다 보니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고 어휘력이 부족해서 학습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sns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유행어와 줄임말 같은 쉽고 휘발성이 높은 단어만 사용하다 보니 말을 할 때 적절한 어휘를 고르는 것도 어려워한다. '헐, 대박, 쩐다' 와 같은 말들은 우리가 실생활에서 감탄사로 종종 쓰고는 하지만 글을
투표, 다들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외에도 학급 회장을 뽑는 학급 투표나 전교 회장과 부회장을 뽑는 투표, 아니면 그냥 친구들끼리의 대표를 뽑는 투표까지. 우리네 생활에서 꼭 하는 것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정한 과정이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결과물을 도출해낸다. 그만큼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하고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이 투표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 과정에는 많은 이들의 피가 흘려졌고, 정의롭고 무고한 시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쓰러졌다. 독재를 타도하자,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다, 라며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과 민주주의가 이끌어낸 결과 중 하나가 지금의 투표가 된 것이다. 따뜻한 봄이 되면 늘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군사 독재를 끝내자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초기 우리나라는 간선제와 헌법 개정을 통해 권력을 이어가려고 했던 지도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간선제로 인해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4•19 혁명부터 5•18 민주화 운동까지 이어진 국민들의 바람과 행동은 민주주의의
평소에 쓰는 단어에 혐오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하는 말을 인식하지 못 하고 사용할 것이다. 무엇이 혐오 표현인지 알지 못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혐오 표현을 접하고, 사용한다.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이 글에서는 특히 아동 혐오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무언가에 대해 서투르거나 미숙한 사람에게 종종 ‘~린이’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한다. ‘어린이’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 것이다. 이 ‘어린이’ 라는 단어가 초보자라는 느낌을 주고는 하는 걸까. 이 단어를 꽤 많이 사용한다. 그 예로 운동 초보자에게는 ‘헬린이’, 요리 초보자에게는 ‘요린이’ 등. 그러나 이제는 이런 단어를 근절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인정해주어야 할 어린이들을 미숙하고 부족할 것 같다는 부정적인 고정 관념이 고정되고, 곧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차별이자 혐오인 것이다. 어린이들이나 학생들의 특징이거나 이들을 대상으로 한 단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어리숙하거나 주변에게 피해를 끼치는 아동을 지칭하는 ‘잼민이’, 급식을 먹는
저명한 철학가 임마누엘 칸트. 그는 무조건적인 정언명령으로 도덕법칙을 만들어 그것만을 따르며 사는 것을 강조했다. 보편주의와 인격주의에 의거한 법칙은 매우 견고했다. 그의 세계에서는 ‘하얀 거짓말’ 도 안 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도덕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는 그가 살던 시대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가끔은 거짓말이 필요하고, 가끔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21세기에서 바라보는 칸트는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반려 동물 천만 시대, 동물보호법, 실험동물에 관한 법률 등. 현대인들에게 동물은 꽤나 큰 의미들을 포함한다. 동물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고, 배곯지 않고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에 드는. 우리와 별 다르지 않은, 도덕적인 권리가 있고,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생명들. 동물 학대는 동물들이 아파하니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칸트에게는 좀 다르다. 그 역시 동물 학대는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인격이 훼손되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방금 막 칸트가 싫어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