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정치적이다. 저마다 지지하는 세력이 있고, 그 입장에 맞추어 보도한다.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한경(한겨레, 경향신문)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한쪽에 치우친 정치 성향을 ‘정파성’이라 한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언론은 단어 선택, 보도 내용, 칼럼 등을 통해 정치색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언론은 분명 정치적이다. 사람들은 이들의 정파성을 비판한다. 언론은 공정해야 하며, 정치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언론의 정파성을 문제 삼는 연구도 많다. 정파성이 오보를 낳는다1)고 주장하거나, 정파성이 문제라는 전제하에 그 연구를 출발2)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문이 있다. 정파적인 언론은 과연 그 자체로 문제냐는 것이다. 사실 정파적인 언론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을부정하는 데에 있다. 모든 사람은 편향적이다. 모두가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사도 그들의 관점에서 사회를 분석하고 보도한다. 정치적 관점은 기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날 수밖에 없다. 그런 정파성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파적인 언론은
얼마 전 흥미로운 설문 하나를봤다. 우리나라 국민의 복수 심리가 전 세계에서 손에 꼽는단다1. 그러니까 이런 거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교복을 바꿀 예정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재학생을 대상으로 어떤 교복을 선정할지 의견을 묻는다. 이때 대다수 학생은제일 못생긴 교복을 고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안 입을 거니까! 이렇게 내가 겪은 부정적인 일을 남에게도 되돌려 주려는 성향을 음의 호혜성negative reciprocity이라고 한다. 일명 "나만 당할 수 없지" 성향이다. 그렇다면 양의 호혜성postive reciprocity, 즉 호의를 되갚는 성향은 어떨까? 수치 자체도 낮고, 순위 역시 조사 대상인 77개국 중 55위다2. 호의는 그다지 되갚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뜻이다.나쁜 것은 반드시 복수해야 하지만, 좋은 것은 받으면 그만이다. 나는 이런 심리를 없애자고 제안하고 싶다. 안 좋은 일은 조금 참고, 좋은 일은 나누자고 말이다. 호구가 되는 거 아니냐고.전혀. 며칠만 해봐도 당신은 깨닫게 된다,이런 삶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나는 이것을 ‘되갚음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런 삶이 어떻게 미학이 되는지, 그러니까
세상이 시끄럽다. 악에 받친 절규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누구는 저래서 힘들고, 누구는 이래서 힘들다고 한다. 뉴스를 보면 정계의 갈등으로 시끄럽고, 친구와 수다를 떨면 입시로 힘든 이야기뿐이다. 온갖 불만과 잡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일단 지금처럼 현실의 불편에 순응하고, 고통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아라.”SNS에서 이 말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모든 사회의 문제는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한다. 그 균열이 눈을 가린다고 해서 메꿔지겠는가? 불편한 100명이 자세를 고치는 것보다, 불편의 원인을 제거해 1,000명이 행복해지는 편이 훨씬 낫다. 후자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회가 발전하는 지름길이 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공감하는 사회가 되면 된다. 내 옆의 가족과 친구를 넘어서야 한다. 길거리에서 마주한 아장아장 걷는 어린이, 인터넷에서 대화를 나눈 이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까지. 그 누구도 비난하지 말고, 동정하지 말고, 그저 그 상황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공감하면 된다. 그 마음의 실현
5월10일,제20대 대통령 당선인 윤석열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제20대 대선에서는 이념적 양극화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개표 결과,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 득표율은 고작0.73%차에 불과했다.우리 국민이 두 갈래로 완전히 분열되었다는 증거이다.그리고 지금,이념 차이와 관계없이 수많은 사람이20대 대통령의 최대 과제가 ‘국민 통합’이라고 말한다.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회의 양극화가 가속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우리 국민이 양분화되는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런 사회를 바라보면 자연스레 미디어 현실을 개탄하게 된다.그간 미디어는 개인별 맞춤 콘텐츠를 추천하여,나와 다른 생각은 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분명히 미디어는 이념적 양극화를 가속한 장본인이다.따라서 오늘은 이념적 양극화와 이에 대한 미디어의 책임을 논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념적 양극화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이념적 양극화는 ‘정치적 양극화’라는 용어로 치환할 수 있다.사람들이 정치적 의견에 있어 극단적인 두 갈래로 양분된다는 의미다.진보-보수 간 갈등이 대표적이다.우리나라 진보-보수 간 갈등은 무척 심각하다. 2019년 한국인의 의식
올해 2월 실시된한국리서치조사1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71%는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과연 이 젠더 갈등은 실존하는 갈등일까? 나는 젠더 갈등은 갈등이 아니며, 이 용어를 우리 사전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젠더 갈등의 비갈등성에 관해 논의하기 전, 먼저 젠더 갈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젠더 갈등은 쉽게 말해 성별 간 갈등이다. 조금 더 풀어 말하면,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적으로 구분하여 양극단이 격렬히 대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성별 간 혐오로 어지럽힌다는 그 젠더 갈등이다. 핵심은 젠더 갈등의 본질이다. 사실 젠더 갈등은 불합리를 고발하고 바꿔 나가는 움직임에서 비롯한다. 전근대적인 사회를 바꾸는, 양성평등을 이루는 간절한 외침이다. 이때 모든 변화는 마찰과 잡음을 수반한다. 그 모든 부산물을 단순 젠더 갈등이라고 치환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더 나은 사회로 향한 목소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다. 따라서 젠더 갈등이라는 말은 틀렸다. 젠더 갈등이 아니라 불합리에 대한 고발이다. 물론 변질된 혐오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젠더 갈등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