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써 나라를 수호하신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시 Ⅲ

윤동주의 생애와 그의 시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윤동주의 아명은 '해환(海煥)'으로 해처럼 빛나라는 뜻이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을로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이은 명동서숙으로 출발한 명동 학교가 있는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다.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도 명동 학교 출신이며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에 교편을 잡았다. 1925년 윤동주는 만 8세의 나이로 수많은 민족 지사들을 배출한 명동 학교에 입학하였다. 명동 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던 동기들과 함께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 소년의 꿈을 키우다가 5학년 때인 1929년에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8년 2월 광명 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고종사촌과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하였고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연희전문 1, 2학년 방학 때 고향에 들러 누이와 동생에게 들려주었다는 태극기 모양과 무궁화와 애국가, 기미 독립 만세와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무렵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운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본이 조선에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해 조선을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때이다. 윤동주는 이때 동시 쓰기를 아예 그만두었고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절필을 하였다.


졸업을 앞둔 그해 11월 윤동주는 그가 쓴 시중에서 18년을 뽑고 <서시>를 덧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의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또 다른 1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출판을 목적으로 이양하 교수에게 1부를 부탁했지만, 교수는 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에 위험도 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 출판을 보류할 것을 권유했고 결국 그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졌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윤동주는 유학 초기에 이국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이는 <쉽게 쓰여진 시>로 느낄 수 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특고 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된 후 1년 뒤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29세의 나이로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 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1968년 11월에 유작인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윤동주의 마지막 시이며 시 속의 저자가 현실 극복을 이루어내는 수단이 자아 성찰이라는 점에서 자기성찰, 미래지향적인 성격의 시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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