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에서 펴내는 <어문연구> 2017년 여름호(통권 174호)에 이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논문 한 편이 실려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백수광부는 무당, 미친 사람, 술의 신 정도의 해석을 가르쳤고 학계에서도 이 3가지 해석정도만 인정해주었다.
고전문학 연구자 이규배 시인(이하 호칭 생략)은 "삼십여 년 아이들을 가르쳐 왔지만 내게 고전문학 연구자의 논문과 주장을 평가할 만한 안목은 없다. 그 방면에 대한 공부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에게 단편적 지식을 중심으로 그 얼개만 가르쳐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지만 그의 논문을 읽어보면 연구자의 주장은 상당한 논거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공(公)'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규배는 ‘공후인’의 배경설화에서 ‘같은 지시 대상이 서로 다른 기호로 지칭되는 맥락’을 중심으로 노래를 다시 살폈다. 노래와 유래담에서 주인공은 한자어 ‘공(公)’으로 불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수광부’라는 비칭(卑稱)으로 일컬어지는 불균형이 있다. 평범한 백성을 ‘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공’은 이 노래가 만들어지던 때와 가까운 시기의 기록으로는 ‘임금, 천자, 주군, 제후’ 또는 그와 비슷한 신분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일반 민중으로 볼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고귀한 신분을 지닌 존재를 가리키는 ‘공’으로 불리면서 한편으로 그는 ‘미친 사내[광부(狂夫)]’로도 불린다. 이 불균형은 이 노래를 지은 이들과 이를 기록한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창작된 지역은 중국이지만 고조선 이래로 한인(韓人)들이 살면서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채록자나 채록 양식은 중국이었다. 이규배는 “동일한 인물을 광부라 지시하여 서술하는 시각은 중국 한족인 채록자 시각이고, 공이라고 호칭하는 시각은 그 아내와 조선인 거류민들의 시각”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곽리자고는 뱃사공 아닌 거문고에 능한 악인
그럼 ‘공’이라는 경칭으로 불린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규배는 주인공이 일반 민중이라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다. 엄연한 계급사회였던 당시에 일반 백성을 ‘공’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공’을 높은 벼슬을 지닌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이 노래의 주인공들을 목격하고 아내 여옥에게 노래를 전하는 곽리자고는 지금까지 ‘조선진졸(朝鮮津卒)’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급 뱃사공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규배는 이 해석도 뒤집는다.
그는 <주례(周禮)> <예기(禮記)> <국어(國語)> 같은 옛 문헌들에서 ‘졸’이 “백사람의 군졸 집단” 또는 “300호의 마을”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음을 확인한다. 동시에 그는 ‘공무도하가’가 처음 채록된 후한 채옹의 책 <금조(琴操)>에서 도문고(屠門高)와 용구고(龍丘高)가 각각 ‘금인’(琴引)과 ‘초인’(楚引)이라는 노래를 지은 악인(樂人)인 것처럼 “곽리자고 역시 금(琴)에 능했던 악인인 것이지 도선장을 지키는 하급군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을 건너다'는 '전쟁 등 사생결단의 행위'
그리고 이 노래의 핵심 어구인 ‘물을 건너다’(渡河)를 국경을 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사생결단의 행위로 해석했다. 이규배는 ‘고조선 어느 지역의 제후로서 왕족’이었으리라 추정하는 ‘공’이 전쟁과 반란 같은 군사적 결단을 내린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공의 죽음 뒤에 그가 떠나간 물가에서 그를 추도하는 제사의식이 있었을 것이며, 이 제사의식을 거행하며 그 비(妃)가 공을 추모하는 만가를 지어 공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며 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공무도하가’는 국경을 넘는 사생결단 끝에 목숨을 잃은 제후 남편을 기린 부인의 노래이며, 그 노래를 들은 거문고 예인 곽리자고와 처 여옥이 악기 공후를 연주하며 불러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진 읽어보면 굉장히 논리적이고 그럴싸 해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빈틈없어 보이는 이 논문에서 허점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백수광부’에서 ‘백수’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물론 문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논리이지만 ‘백수’의 의미를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저 한 연구원의 논문으로 끝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