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내가 지킨다,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 그는 누구인가.

간송 전형필. 상당 수의 학생들은 물론이며, 어른들까지도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전형필이 우리의 역사를 지켰다고 감히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6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전형필. 1940년대 초기에 이미 우리나라를 넘어 동북아시아에 이름이 알려진 대수 장가였다. 그는 위창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간송'이라는 호를 받았다. 아래는 위창 오세창 선생에 대한 설명이다.

 

【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은 개화를 선도한 개화파이면서도 천도교인으로서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였다.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적통으로 이어받았고 한학에서도 대학자였다. 위창은 간송과 같은 젊은이로부터 우리나라의 미래를 읽었고, 이 어려운 세태에 이런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과 편안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위창은 전형필에게 그 맑음에서 ‘물 흐를 간(澗)’ 자를,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뜻을 기리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명문에서 ‘소나무 송(松)’을 써 간송이라는 호를 선사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 - 한국의 미를 지킨 간송의 삶과 수집 과정 (테마로 보는 미술) 】

 

오세창 선생은 전형필에 호에 물 흐를 간(澗) 자와 소나무 송(松) 자를 사용했다. 또 오세창 선생은 간송을 높이 평가한다. 간송은 24살에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단순히 그 재산을 가지고 흥청망청 놀기보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결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간송은 다른 부자들과는 달랐다. 간송이 살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의 문화재를 그저 수집용으로 취급해 빼앗아가고 있던 시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간송은 매우 비통해했고, 한국의 역사적인 문화재들을 사들이기로 결정한다. 조국의 문화재는 후손들을 위해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5년 어느 날, 고려 청자가 일본인 수집가에게 1,000원에 팔린다. 당시의 1,000원은 그 당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이를 들은 간송은 그 일본인에게 찾아가서 20,000원을 지불해 되찾아 온다. 수집가가 샀던 금액의 20배. 즉, 집 20채를 살 수 있는 액수를 지불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간송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하게 느꼈다. 당연한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간송은 알고 있었다. 문화재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또, 역사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려청자를 되찾아온 며칠 후, 또 다른 일본인 수집가가 간송을 찾는다. 그는 청자의 값으로 40,000원을 제안했다. 간송이 원가의 20배를 지불하고 사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집가는 간송이 지불한 가격의 두 배를 제안했다.

 

그럼에도 간송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입을 열어 하는 말이, "나에게 이 청자보다 더 좋은 무언가를 가져오시오. 그렇다면 내 기꺼이 비싼 값으로 그것을 사리다. 또한, 이 청자도 당신에게 팔겠소." 수집가는 포기하고 떠난다. 가장 값어치 있다고 생각해 찾아왔는데, 더 좋은 것을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간송의 확고함에 굴복했다고 할 수 있다. 간송이 지켜낸 고려청자는 현재 국보 68호다.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이 안동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간송은 중개상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사고 싶어 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때문에 훈민정음 원본처럼 중요한 문서를 사거나 보관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겠다는 꿈을 가졌고, 마침내 1943년에 손에 넣는다. 중개상은 1,000원을 요구하지만, 간송은 11,000원을 지불한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문서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간송이 찾아온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아래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설명이다.

 

【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며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훈민정음 해례본 -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밝히다 (위대한 문화유산) 】

 

당시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부재로 창제의 원리에 대한 정의를 추측에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고대 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 화장실 창살 모양의 기원설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는데, 이는 한글을 비하하기 위한 일본 어용학자들의 주장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한다. 한 나라의 언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세계관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우리의 말, 우리의 글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18세기 조선의 실학 연구자들의 연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언해본은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쓴 것인데, 일제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며 허구의 문서라고 주장한다. 또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해례본을 찾아 없애고자 한다. 만약 일제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 정신을 담는 그릇의 뿌리와 기원이 허구화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간송은 해례본을 지켜냈고, 현재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중 하나로 남게 된다.

 

간송은 이외에도 수많은 전통 한국 예술 작품들을 수집했다. 사람들은 왜 그가 재산의 거의 대부분으로 문화재를 사들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귀중한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간송이값을 정확히 지불해 돈을 아껴서 많은 문화재를 사들였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간송 덕분에 우리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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