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중립외교, 이래도 폭군이냐

광해군의 재평가가 시급하다

 

광해군,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들처럼 '조'나 '종'이 붙지 않고 연산군과 같이 '군'이 붙었다. 

그 이유는 광해군이 '폭군'이라 평가받기 때문이다.

 

조선 14대 왕 선조가 조선을 다스리던 시절,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가버리고, 그의 아들 봉림대군은 맞서 싸우면서,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를 질투한 선조는 어린 아내를 얻어 영창대군을 낳게 되는데, 이후 선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와 동시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 세력도 함께 정권을 잡게 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광해군이 편파 정치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당시가 붕당정치 사회였다는 것이다. 광해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하들이 붕당으로 나누어져 정권이 오락가락하던 시대였고, 후에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내세우면서 잠시 혼란을 면했을 뿐이다. 영조와 정조의 사후에 붕당정치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에는 붕당정치가 당연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해군은 편파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즉위 후에, 후금과 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현재 실세인 후금에 붙을 것이냐, 이제껏 함께 해왔던 명과의 의리를 지킬 것이냐. 광해군은 실리를 위해 '중립외교'를 펼치기로 선택한다. 광해군이 실시한 중립외교는 명과 후금이 다툴 때, 명의 군사지원 요청을 들어주는척하고 군사를 보낸 후, 후금이 공격하려 하면 바로 항복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명에게는 군사를 보내주었으므로 의리를 지킬 수 있었고, 후금에게는 일부러 출병한 것이 아니라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공납의 의무를 줄여주었다. 이런 훌륭한 업적들을 세웠음에도 왜 폭군, 혹은 또라이라 평가되는지에 대한 이유는 광해군이 어머니 인목대비와 배다른 형제 영창대군을 죽인 것에 있다. 때문에 광해군이 패륜이라며 '군'을 붙인 것인데,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친어머니가 아니다. 물론 계모에게도 살인의 죄를 범하면 안 되지만,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어머니였다. 따라서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친아들 영창대군이 왕이 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따라서 인목대비와 광해군은 광해군의 즉위 전부터 대립관계를 형성해왔고, 광해군의 즉위를 막는 장애물이 바로 인목대비였다.

 

그래도 광해군은 어머니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북인들의 강요로 결국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죽이게 된다. 이렇게 다사다난한 정치가 계속되던 중 1623년, 인조와 서인들이 명과의 의리만을 지켜야 한다며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난하며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광해군과 북인들은 쫓겨나고, 인조와 서인들이 권력을 잡는 것으로 광해군의 정치는 끝나게 된다.

 

이렇듯 광해군은 폭군이라고 하기에는 훌륭한 업적들도 많다.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사료들도 많이 남아있지만, 이는 모든 왕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즉, 광해군에게만 잘못된 업적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광해군'이라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예전보다는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사회적 흐름에 따른 광해군의 재평가가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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