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빈의 영화 칼럼] 삶에 저항하는 방법- 분노를 받아들여라.

장미의 땅 : 쿠르드의 여전사들

기적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흙 속에서 썩어가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자신의 병으로부터 일으켜 영생을 가능하게 한다면, 가능성에 대항하는 모든 도전들이 이룩한 유토피아에서 기적을 바라지 않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단순한 매커니즘이 아니다. 기적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자, 어쩌면 우리가 성공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하나의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이지 너와 나처럼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는 묵직한 울림이다. 쿠르드족 무장 독립운동단체에 소속된 여성들이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IS)에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이유는 실패의 정의를 다시 쓰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기적을 바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기적을 바랐기 때문에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섰던 것도 아니다. 단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전쟁터에서 불편한 자세로 기적을 논하기 이전에 들었기 때문이리라.

 

 

기적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힘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면, 자유와 정의가 투쟁의 결과로 주어지기를, 쿠르드족 여성들은 어깨에 총을 둘러메고 전쟁터로 향하는 순간까지, 장전된 총의 무게가 총기의 무게 이상으로 느껴지는 순간까지 바랐을 것이다. 총소리가 빗발 치는 장미의 땅에서, 영혼에게 용서를 구하며 그녀들은 투쟁에의 첫 발을 내딛었다.

 

성별이분법적인 논리를 적용하여 여성과 남성의 전투력 그리고 정신력을 비교하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지만, 그녀들은 남성 군인 못지않게 훌륭한 전투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으므로 '군인' 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연상되는 남성의 이미지를 끌어오지 않을 수 없다.

 

쿠르드족 무장 독립운동단체에 소속된 어느 여성은 '내일 저희는 전투에 나갑니다.' 라는 말로 자신의 영상일기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소망은 자신이 소속된 쿠르드족 무장 독립운동단체가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곳의 아랍인들을 최대한 많이 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말이 자신의 유언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쩄거나 이 영상일기는 감독님께 드리고 싶다며, 일기를 끝맺기 전에 자신은 앞으로 '우리'가 더 멋지고 자유로워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상일기를 촬영한 다음날, 그녀는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와의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이건 작별인사가 아니에요. 우리는 작별인사가 없거든요, 절대 작별인사를 하지 않죠.' 라는 그녀의 말에서, 쿠르드족 여성들의 각오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투에,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 임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면서, 총알을 장전하면서, 그녀들도 이따금 살고 싶다는, 살아서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더불어,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감독에게 ' 늘 자유롭게 살아가며 자유롭게 작품을 만드시길 빌게요. 자유로운 심장과 머리로 많은 걸 이뤄내세요.'라고 말했다. 감독 역시 쿠르드족 출신으로, 자유로운 심장과 머리로 많은 것을 이루어내라는 여성 군인의 말에서 그녀로 하여금 감독이 이루어내길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유로운 심장과 머리, 쿠르드족 여성들은 자유로운 심장과 머리를 되찾기 위해, 자유롭게 사고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그토록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는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녀들이 자유로운 심장과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한들 뜻을 펼치지 못할 것이 자명하므로. 단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녀들은 정의를 실현할 것과 더불어 자유를 요구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그녀들의 세상에서, 자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너무나 당연해서 요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다.

 

새햐얗게 명멸하는 전쟁터의 밤이 그녀들에게는 극야가 아닌, 백야였으리라. 하얗게 명멸하는 밤, 하얗게 아물어가는 상처, 우유처럼 새하얗고 고요한, 멸망을 주고받으며 다정하게 밤을 지새우던. 백야 속에서 전쟁을 대비하는 한편 떠나간 동료들을 애도했으리라. 쿠르드족 여전사들이 직면한 현실은 영화와 비교가 되지 않을 뿐더러, 내전으로 풍비박산이 난 일부 국가와 달리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의 잔혹함을 상쇄할 수도, 미디어를 통해서 비극성을 심화시킬 수도 없다.

 

쿠르드족의 인구수는 팔레스타인보다도 많지만, 정의, 무엇보다도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을 미디어에서 직접적으로 조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미디어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참상과, 내전이 야기한 혼란을 사실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쿠르드족 여전사들의 투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삼류 로맨스 영화에 들어가는 비용의 반만큼도 투자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효과적인 비유를 위해, 삼류 로맨스 영화를 예로 들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영화 채널에서는 주말 아침이면 그렇고 그런, 완벽한 남자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완벽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를 방영하므로,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채널은 극히 드물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는 더욱 그렇다. 간혹 전쟁 영화조차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전 연령의 팬들을 사로잡기에 적절하지 못한 영화로 여겨진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미디어가 조명하지 않는다면, 필요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된 세대에서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녀들의 투쟁은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투쟁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음에도. '또다른 투쟁을 위해서' 피를 흘리도록 하는 모든 투쟁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쿠르드족 여전사들의 투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그녀들의 후손이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는 세상에서 자유로운 심장과 자유로운 머리를 소망하게 되었을 때, 그녀들의 투쟁은 이미 역사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역사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투쟁해야 할 때임을, 쿠르드족 여전사들이 직접 피로 써내려간 역사를 통해서 깨달을 것이다.  후손에게 가르침, 혹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역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교훈을 미래에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쿠르드족 여전사들은, 역사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역사를 다시 쓸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덩케르크를 뺴놓고는 전쟁에 노출된 이들의 삶과 투쟁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조명한 영화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덩케르크에서 전쟁이 어떻게 젊은이들의 심장을 망가뜨리는지를, 어떻게 지옥을 방불케 하는 전쟁터에서조차 자유를 갈구하도록 만드는지를 다루었던 데 반해 장미의 땅 : 쿠르드의 여전사들에서는 그렇게 심장이 망가진 젊은이들이(그리고 여성들이) 무엇을 위해서 투쟁하는지를 사실적으로 조명하였다. 덩케르크와 장미의 땅 : 쿠르드족 여전사들은 전쟁의 참상을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작품 전반에 걸쳐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여느 전쟁 영화와는 다르다. 덩케르크에서 알렉스와 토미를 비롯한 병사들은 결국 집으로-그들이 바라던 장소, 그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 받을 수 있는 장소로-돌아갔고, 장미의 땅 : 쿠르드의 여전사들에서 쿠르드족 출신 여군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헛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전쟁터의 악몽에 밤낮없이 시달리게 될지라도, 매일 밤 꿈에서 죽은 동료들의 망령을 보게 될지라도, 덩케르크의 병사들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쿠르드족 여전사들의 일부는 죽어서 별이 되었고, 일부는 살아남아서 쿠르드족이 겪었던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기억에 오래 남을 죽음을 묘사하는,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 말과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라던 고흐의 말, 쿠르드족 여전사들은 '별까지 걸어가지는' 못했지만 별을 향해 달음박질칠 수는 있었으리라. 늙어서 죽지는 못했지만, 평화를 위해 투쟁하다 죽음을 맞았으므로, 그녀들은 마지막 순간에 별을 향해서 힘껏 달려갈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덩케르크에서, 역 근처에서부터 기차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다가 플랫폼에 들어섰을 때 완전히 멈춰서는 장면에서 내가  느꼈던 슬픔과 장미의 땅 : 쿠르드의 여전사들에서 그녀들이 느꼈던 고통과 슬픔, 그리고 분노. 슬픔과 분노는 다른 상황에서(혹은 다른 세상에서) 잉태된 감정임에도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점은, 명백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슬픔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떠한 사실에 대한 분노를 격발시켜야 한다. 간혹 슬픔은 노골적으로 분노를 요구한다. '만약 내일 세상이 끝난대도 우린 그냥 끝을 맞으며, 끝 맞으며'(자우림. 있지 中.) 라는 가사에서 화자의 체념과, 체념으로 명백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 드러난다. 앞의 가사가 '있지, 어제는 하늘이 너무 파래서 그냥 울었어' 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늘이 파래서, 단지 하늘이 파랗다는 이유로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게끔 만들었던 새파란 슬픔은 화자의 분노를 격발시키고, 화자는 삶을 열망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무기력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무기력은 독처럼, 정신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퍼진다. 은밀하게 퍼지는 무기력과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되어 버린 삶,  화자는 무기력으로 일관하지만 결국 자신의 무기력으로 인해 스스로를 내버리는 데까지 이른다. '오늘은 나도 모르게 나를 내버리다가', 나를 내버리다가.' 라는 가사에서 화자의 절망과 순탄치 않은 삶에 대한 증오, 그러나 지쳐 있는 증오가 느껴진다. 그러나 화자가 자신의 삶과 사랑, 자신의 것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랑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더라면 슬픔의 원인이 파란 하늘임을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다. '있지'의 화자에게 그의 처지와, 그럼에도 그가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은 분노였다. 토미에게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켜버렸던 알렉스와, 억압에 분노했고 그래서 총을 들었던 쿠르드족 여성들, 삶이 왜 그리 어려웠는지를 깨닫게 된 '있지'의 화자. 칼럼을 작성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반면 분노를 받아들이는 데에, 분노가 혁명의 불씨로 거듭나는 데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우리는 땅에 쓰러지더라도, 모닥불이 타고 남은 재가 얼굴에 뿌려지더라도, 슬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슬픔에서 촉발된 분노를, 슬픔의 발화를 증명하는 유일한 대상인 분노를 받아들여야 한다. 때로는 분노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삶에 저항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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