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만날때 가장 큰 소통의 걸림돌은?

언어와 매체 수업시간에 특별한 모둠활동을 했다. 바로 남북한 통일어 만들기, 남한의 표준어와 북한의 문화어간의 차가 심한 가운데 통일의 주역인 청소년들이 스스로 통합언어를 만들어보는 활동이었다. 친구들과 의견을 모아 여러가지 언어를 만들어보던 나는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부터 10년 뒤 통일이 된다면 혹은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어 우리가 북한 사람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면, 둘 사이의 소통에서 뭐가 제일 걸림돌일까?

대부분 남북한간의 언어차이를 꼽을 것이다. 지난 70년간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어왔으니까. 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어 수업시간에 남북한 통일어 만들기에 대한 모듬활동을 하다 의문이 생겨 찾아본 학술논문에는 그런 나의 예상을 깨는 조사결과가 담겨있었다.

<새터민들이 꼽은 언어생활 어려움의 첫째 원인>
1위 남쪽사람의 영어표현 (40%)
2위 발음과 억양의 차이 (25.9%)
3위 생활용어 모름 (8.6%)
4위 물건이름 모름 (5.7%) 심리적 위축감 (5.7%)
(출처 : 통일부 통일교육원 연구개발과(2003), '북한이탈주민의 언어생활에 나타나는 북한언어정책의 영향')

지난 2003년 통일부가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에 정착한 새터민들에게 '남한에 살면서 언어생활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였다. 새터민들은 가장 큰 어려움으로 '남북한 언어차이'가 아닌 '남쪽사람의 영어표현'을 꼽고 있었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쓰고 있는 영어표현들을 북한 사람들은 언어생활의 어려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남북한 의사소통 장애요인을 연구해 논문을 발표한 영남대학교 박종갑 교수는 우리의 무분별한 영어표현이 남북한 소통의 결정적 장애가 될 것이라고 쓰고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면 남북 주민의 의사소통과정에서의 결정적 장애는 남한 사람들이 쓰는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에서 비롯될 것이다. 분단 이전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을 비교하면 남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본 북한말의 이질화보다 북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본 남한말의 이질화가 더 심하고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박종갑(2007), '남북한 주민의 의사소통 장애 요인과 그 해소 방안에 대하여', 한민족어문학회, 27쪽)


위 논문에서는 무분별한 영어표현으로 얼룩진 우리들의 국어사용환경 사례를 들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끼리 나누는 대화의 한 장면을 보자.

박OO : 아니 아슬아슬해서 못 보겠어요 너무 데인저러스하세요.
강OO : 이게 아주 디테일하게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박OO : 아 순간적으로 이게 럭셔리한 데이트구나 라고 생각했다가 …
김OO : 굉장히 샤프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 안쪽에 쑥스러워하고 이런 매력이 굉장히 … (SBS '야심만만' 2005.3)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이름을 살펴보자. 연구자들이 2000년대 이후에 생긴 아파트 이름 520여개를 조사했는데 그 중에서 영어로만 된 것이 304개이고, 영어와 다른 언어가 섞인 구성까지 합하면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대우 트럼프월드, 성우 헤스티아, 신일 엘리시움, 삼성 미켈란쉐르빌, 현대 하이페리온, 서해 그랑블, LG Xi, 아이투빌(I2vill), 금호 리첸시아, 두산 위브(We've) 등등 '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박 교수는 같은 남한에 사는 지인끼리도 영어식 아파트 주소는 알아듣기 힘들어한다며 만일 통일이 된 후에 북한의 함경도에 사는 친척에게 자신의 아파트 이름이 포함된 주소를 전화로 불러준다면 과연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의문을 표했다.

반면 이질화된 남북한의 언어표현에 대해서는 의사소통에서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보인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문화어나 남한의 표준어는 모두 분단 이전 서울말 중심의 표준어를 계승한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화어와 표준어는 모두 분단 이전의 서울말 중심의 표준어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북한의 말다듬기나 남한의 국어순화 운동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같고 설사 그러한 결과로 새로 생긴 낱말이 생소하다 해도 양쪽의 주민들 대부분이 그 원래말도 아울러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고빈도 어휘의 경우 양쪽이 동일한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고무적이다."

(출처 : 박종갑(2007), '남북한 주민의 의사소통 장애 요인과 그 해소 방안에 대하여', 한민족어문학회, 20쪽)

논문을 읽고 난 뒤 우리 동네 유명 커피집의 메뉴판이 떠올랐다. 커피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영어표현들. 남과 북의 통일어를 만드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영어표현을 쉽고 고운 우리말로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나를 포함한 청소년들도 충분히 우리말로 쓸 수 있는 표현을 영어식으로 쓰는 경우가 참 많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어로 표현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송매체 출연자 등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주는 유명인들이 스스럼없이 영어식 표현을 쓰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우리말 동아리 활동 중 하나로 청소년들이 즐겨보는 예능프로그램을 함께 보고 방송 중에 나오는 영어식 표현을 친구들과 함께 정리하고 이를 학교에 게시해보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품격있으면서도 쉬운 우리말 표현을 많이 만들고 사용했으면 좋겠다.

 

<출처>

새터민 의식조사 : 통일부 통일교육원 연구개발과(2003), '북한이툴주민의 언어생활에 나타나는 북한언어정책의 영향'

학술논문 : 박종갑(2007), '남북한 주민의 의사소통 장애 요인과 그 해소방안에 대하여', 한민족어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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