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빈의 영화 칼럼] 내가 온전하게 내 것이었던 시절, 그 시절의 나에게 바치는 헌사.

잉글랜드 이즈 마인 : 더 스미스의 탄생비화

 

'세상은 나 같은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야. '

 

위의 대사에서 더 스미스의 리드보컬, 우울하고 시적인 청춘의 방황에서 잉태된 듯한 인물 패트릭 모리세이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이즈 마인'을 감명깊게 본 사람이다. 청춘이 청춘을 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면 당신은 패트릭 모리세이처럼,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영화의 제목이 오히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인 까닭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지금, 내일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계절에 잉글랜드 이즈 마인을 보아야 한다. 패트릭 모리세이에게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내일이 오지 않을 거라 믿으며 젊음을 추모했던 청춘의 기억은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잉글랜드 이즈 마인이 낙엽이 떨어지고 하늘 색이 더욱 짙어지는, 세상이 동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가을에 보기 좋은 영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낙엽처럼 방황하는 젊은 영혼을 타이르는 듯한 영화라서, 어쩌면 '잉글랜드 이즈 마인'이 청춘의 우울을 아주 사실적으로,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라서 오히려 가을에 보기 좋은 영화로 여겨지는지도 모른다.

패트릭의 우울감은 영화 내에서, 청춘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와는 또 다른 것으로 묘사된다. 패트릭은 천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울해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그에게 세상은 시시하고, 지루하고, 무엇보다 냉혹한 곳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처럼, "피의 맛인가? 아니야, 그것은 사랑의 맛."이라는 살로메의 대사는 사랑의 양면성 외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패트릭은 살로메였다가, 정작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를 사랑하고자 했던 살로메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요하난이었다가, 삶을 증오했던 모든 사람들의 대변인으로 돌아온다. 패트릭의 나레이션은 영화에 깊이감을 더할 뿐 아니라, 그가 삶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대변인인 것처럼, 삶을 증오하거나 한때 증오했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천재 작가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처럼, 천재로 태어난 패트릭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전쟁이며 오래전에 작가의 손을 떠난 비극 작품이다. 패트릭의 인생은 그럴듯한 비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감히 결말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 너무도 그럴듯한 비극 작품. 하지만 이건 더 스미스의 이야기이다. 더 스미스의 리드보컬 이야기이다. 패트릭 모리세이. 시와 견줄 만한 수많은 노랫말들을 만들어낸 그의 이야기이다. 더 스미스는 브릿팝의 양대산맥으로 통하는 오아시스와 블러에게 영감을 준 밴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브릿팝의 전설,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화였던 더 스미스의 리드보컬,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던 인물 패트릭 모리세이의 청년 시절에 대한 영화가 바로 잉글랜드 이즈 마인이다. 일반적인 전기영화와는 다르게, 패트릭이 '더 스미스의 리드보컬 패트릭 모리세이'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순간에서 모든 영화적 사건이 종결되고 마침내 영화가 끝난다. 인물의 탄생부터 최후까지를 빠짐없이 조명하는 여타 전기영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우울한 청춘을 보낸 패트릭이 예술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영화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끝을 맺는다. 그냥, '갑자기'와는 또 다른, '그냥'으로 영화를 끝낸다.

 

패트릭 모리세이의 삶을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한 영화, 스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청춘을 유기하기로 결심한 가엾은 청춘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영화는 잉글랜드 이즈 마인이 유일할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느낌을 기록하는 일에서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인물 패트릭 모리세이는, 훗날 그가 더 스미스의 리드보컬로서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을 때 얻게 된 브릿팝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 자신의 느낌' 을 비극의 언어로 기록한다.

 

덩케르크에서 진솔한 연기를 펼친 잭 로우든은 패트릭 모리세이 역으로 다시 한 번, 솔직하고 섬세한 청춘 역할에 도전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패트릭 모리세이는 훨씬 우울하고, 관계 맺기에 서툴며, 그에게 주어지는 대부분의 시련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패트릭 모리세이가 한없이 약한 인물로, 불안하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내에서 패트릭 모리세이는 파도가 지나간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물의 방문을 기억하는 바닷가의 모래처럼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을 겸허히 살아내는 인물로 묘사된다. 세상은 '나' 같은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패트릭은 딱히 부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우리를 위한 곳이 아니야, 그러니까 부디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두려워하지는 말아. 왜냐하면 여기는 우리를 위한 곳이 아니니까.' 라고 투박하게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쓸쓸하고 외로운, 문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청춘의 가을에 대한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패트릭 모리세이가 더 스미스의 리드보컬로 활동하는 동안에 지은 노랫말처럼 깊은 절망감이 느껴지지만 절망에서 희망이 잉태될 수도 있으며, 삶이 시련처럼 느껴지는 동안은 바닷속을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삶 근처를 배회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일종의 성장영화다. 영화 내에서는 패트릭 모리세이가, 영화 밖에서는 관객들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면적으로 성장한다. 관객들은 패트릭과 함께 성장한다. 성장에 대한 메타포 없이, 작위적인 메시지 없이 함께 성장할 기회만을 툭 던져주고 그대로 돌아서서 가버리는 듯한 영화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의 스타일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성장한다. 성장 이후에는 각자의 길을 간다. 그러나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만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임을 각자가 알고 있다.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라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정신적으로 성장한 후에도, 세상이 나를 위한 곳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괜찮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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