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빈의 영화 칼럼] 우리 사랑은 푸른색이었다

문라이트 : 성숙해지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성숙해졌던 소년들.

어쩌면 네가 내 블루 문이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너를 너무 빨리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르지.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너에게서 도망쳤고, 결국 난 행복해지는 것마저 두려워하게 되었어.

(원문 : Maybe you were my blue moon.  maybe i let go too soon.

Running from what could be, So terrifled of happy)

 

트로이 시반(Troye sivan)의 미발표곡(유튜브에서만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곡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아는 사람만 아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멜로디가 오히려 곡의 쓸쓸한 분위기를 극대화시키는 사랑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블루 문은 문라이트에서 주인공 샤이론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던, '푸른색'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곡이다. 오로지 푸른색 물감만을 사용해서 그린 그림. 문라이트가 뮤지컬 영화였다면, 샤이론은 아마도 달빛 아래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샤이론의 삶과 사랑은 푸른 달처럼, '블루 문'처럼 쓸쓸하고 아름답다. 어쩌면 샤이론의 삶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은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의 무관심과, 그를 짓누르는 눈물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던 어린 날에 대한 모욕인지도 모른다. 샤이론은 삶에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다. 샤이론은 너무 많이 울어서 때로는 자신이 눈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고 말한다. 너무 많이 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은, 얼핏 초라하고 처절해 보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흘리게 될 눈물처럼 순수하게 아름답다. 깨끗하지 않지만, 감정의 집합체나 다름없지만 눈물은 분명 아름답다. 샤이론의 삶이 그렇다.

 

달빛은 음지를 표방하는 주인공들의 삶에 허락된 단 하나의 빛이다. 그나마도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는' 달빛 아래에서의 삶을 꿈꿀 수가 없다. 빛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는 철저한 음지의 삶을 사는 셈이다. 가구를 팔아서 마약을 사는 어머니와 왜소한 체격 때문에 붙여진 '리틀'이라는 별명, 훗날 깨닫게 되는 성 정체성까지, 샤이론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은 모두가 어둠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샤이론은 마약에 중독되어 자신을 돌볼 여력이 없는 어머니 대신, 마약 거래상인 후안에게 의지한다. 아버지처럼 따르는 존재가 하필이면 마약 거래상이라니, 샤이론의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팔아 마약을 사는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하고 한 아이러니다. 샤이론이 마약 거래상 블랙이 된 데에는 후안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후안이 샤이론에게 마약을 팔아 보라고 권유하거나, 마약 중독자들과 거래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마약 중독자 어머니를 둔 소년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은 마약 거래상인데. 왜소한 체구 때문에 이름 대신 리틀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렸던 샤이론은, 마약 거래상이 된 이후부터는 '블랙'이라고 불린다. 블랙, 검은색, 어둠을 의미하는 검은색, 샤이론이 블랙이라는 이름을 택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달빛 아래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인다'는 말을 샤이론에게 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후안이고, 그가 죽은 이후에 샤이론이 마약 거래상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분명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하다. 푸른색 위에 검은색을 덧칠하려는 듯한 샤이론의 행보, 그러나 여전히 달빛 아래에서 푸르게 보이는 그의 얼굴. '블랙'은 어린 시절에 불리던 '리틀' 이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샤이론을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

 

간혹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가 있다. 소설 <폭풍우 치는 밤에>에서 기어이 산 정상에 도착한 메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가부를 부르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던 것처럼. 대사나 독백, 혹은 다른 인물의 죽음을 통해서 주인공의 남은 삶이 이제까지의 삶보다 더 불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영화가 그렇다. 예컨대<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결국 학교를 떠나야만 했고, 그가 교실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불현듯 닐과 키팅 선생을 잃은 뒤의 토드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드가 훗날 시인의 재능을 꽃피울 수도 있지만, 마음속의 결핍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므로.

 

완곡한 '새드엔딩' 은 이처럼 인물의 삶에 대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다행히 질문을 허용하는, 현실과 타협한 주인공들의 모습이나마 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 영화이므로 샤이론의 삶, '블랙' 이후의 삶에 대한 질문을 품을 수 있었다. 샤이론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스크린 속에서, 샤이론의 기구한 삶이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섬세하게 그려지는 동안에는 그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지-언젠가 이 모든 불행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흑인 소년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를 묻기 전에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흑인 소년이 언젠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를 물어야 한다고. 오로지 사랑으로만 삶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흑인, 퀴어(동성애자), 불우하기 그지없는 가정 환경, 흉터투성이인, 너무 낡아버린 영혼.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커녕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도 못할 듯한. 그러나 샤이론은 사랑을 하지 못하더라도, 혹은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살랑으로 충만하지 않은 삶 속에서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느리고, 진전 없어 보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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