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빈 역사시사 칼럼 5] 여성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3 . 1 운동 이전까지는 몇 십년간 조선에 있었지만 여성을 보지 못했다.”

 

이 말은 1900년대 조선에 살던 외국인 남성의 기록이다. 약간 과장된 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 당시 조선에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단적인 예로 여러 독립 운동 단체, 활동들이 있었지만 3 . 1 운동의 유관순을 제외하면 항상 대표적인 인물로 뽑는 것은 남성이다. 모두 김원봉은 알지만 그의 부인이자 부산의 유일한 여성 독립투사였던 박차정 의사는 알지 못한다. 또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는 알지만 임산부의 몸으로 폭탄 의거를 실시한 안경신 열사는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많은 기록이 없기도 없을뿐더러 남성에 비해 아주 소수만이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역할을 맡지 못해서도 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의 많은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남성보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적었던 것일까? 당연히 그들도 참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조선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정서, 타인에 의해서 나설 수 없었던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독립 운동을 하러 해외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집안을 먹여 살릴 가장은 아내다. 국가를 위한 마음은 같은데 투쟁이나 정치 활동은 막으면서 정작 집안의 경제활동은 여성이 하는 조선의 현실이 참 모순적이다.

 

그렇다면 현재로 돌아와서 지금은 그들 사이의 차별은 없는지 의문을 던져본다. 정말로 두 성별 다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객관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강력범죄(흉악) 피해자 현황’은 흉악 강력범죄 피해자 중 84% 이상은 여성이며 성별 확인이 어려운 피해자들을 제외하면 약 10%가 남성이라고 한다. 나는 몇년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동거하고 있었던 여자를 폭행하여 살해한 뒤, 시멘트와 함께 매장한 남성이 고작 3년의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아버지를 수면제로 살해했다는 여성은 무기징역을 받았다. 또한 범죄 처벌뿐만 아니라 흔히들 이야기하는 ‘유리천장’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음이 통계로 여실히 드러났다. 500대 기업 임원 중 96.4%는 모두 남성이다.

 

 

하지만 이제 조선시대가 아니고 사람들의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평범했던 발언들이 이제는 불편한 말이 되었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사소한 변화들부터 시작하면 몇 년, 몇 십 년 뒤에는 지금을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제게 묻습니다.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이렇게 답합니다. 9명 모두요. 미국 역사에서 대부분 대법관 9명이 모두 남자였어요.

그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긴즈버그 대법관-

 

‘대법관’이라는 단어에 무심코 고정적인 선입견을 떠올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을 재인식하게 만든 신선한 충격이 내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무조건적인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을 떠나 사람들이 지연, 학연, 혈연, 재력 등으로 판단되지 않고 순수하게 스스로가 가진 능력으로 대우받는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일단 그 사회로 가는 초석으로 양성평등의 실질적 실현이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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