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빈의 영화 칼럼] 사랑의 껍데기를 쓴 비밀, 비밀을 먹고 자라는 사랑

<리빙보이 인 뉴욕>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보다 한층 비밀스럽게 자라난다

"난 사랑 영화라면 지긋지긋해, 다 똑같잖아. 예쁘지만 이상하게도 관계에서는 늘 실패를 경험하는 여자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남자 아니면 모든 면에서 심각하게 모자라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게 다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사랑 영화라면 지긋지긋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모든 사랑 영화가 그런 플롯을 따르지는 않는데.' 였다. 하지만 친구로부터 사랑 영화의 플롯은 전부 똑같다는 말을 들은 시점이 <리빙보이 인 뉴욕>이라는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면, 사랑 영화란 죄다 지긋지긋할 뿐이라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을지도 모르겠다. <리빙보이 인 뉴욕>은 분명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정석적인 로맨스 영화와는 다르다. 등장인물들이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도, 익숙한 플롯으로 전개되는 보통의 로맨스 영화와는 무언가 다르게 느껴진다. 이 칼럼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사랑 영화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울분을 토해내던 친구에게 그렇지 않은 사랑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내 친구와 마찬가지로 사랑 영화의 익숙한 플롯에 싫증이 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사랑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리빙보이 인 뉴욕>이라는 영화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다른 로맨스 영화 그리고 관계맺기에 서툰 남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의 로맨스 영화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해 보려 한다.

 

* 사랑 이야기? 아니, 이건 사랑보다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

<리빙보이 인 뉴욕>이 정말 사랑에 대한 이야기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사랑하게 된 소년이 스스로 인생의 아이러니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존재론적 스케치라고 답할 것이다. <리빙보이 인 뉴욕>을 단순한 사랑 영화로 규정하기에는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사랑하게 된 작가 지망생' 이라는, 주인공의 충격적이리만치 과감한 스펙이 마음에 걸린다.  사랑에는 인종도 성별도 없지만 나이와 윤리는 있다는 말처럼,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소년의 고백은 '보통의 로맨스' 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아버지의 불륜 상대와 만남을 이어가는 주인공 토마스는, '불륜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뻔뻔하고 매력적인 인물의 전형이 아니다. 토마스가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뒤따라간 이유도 사실은 꽤 평범하다.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토마스는 '엄마를 위해서'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쫒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토마스의 가정을 말 그대로 파괴해 버리기 전에, 토마스의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앗아가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든 저지하겠다는, 치기어린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리라. 이 어처구니없고 묘한 사랑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맨스 영화의 성지라 불리는, 뉴욕을 무대로 펼쳐진다. 뉴욕에서, 톰 행크스가 인터넷 채팅룸에서 메일을 보내고 해리가 샐리에게 날 볼 때면 미친놈 보듯이 인상을 쓰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리고 우연히 로맨스 영화 속으로 이동한 로맨스라면 치를 떠는 여자가 자기 인생이 빌어먹을 로맨스 영화가 되었다며 비명을 지르는 곳에서. 로맨스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통속적이고 또한 충격적인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 '토마스' 라는 너무나 평범한 인물을 내세워, 너무나 위대한 사랑을 설명하다.

큰 키에 우중충한 색상의 점퍼, 갈색으로 테를 두른, 얼굴의 절반을 가려버리는 둥그런 안경, 그러나 안경알 너머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는 토마스가 때묻지 않은, 돈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도시 뉴욕에서 보기 드물게 순수한 영혼임을 나타낸다. 토마스는 그 자신이 뉴욕에 어울리지 않으며, '뉴요커'가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점점 더 겉돌기만 할 뿐이라고 느끼지만 정작 토마스가 바라보는 뉴욕은 세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아름답다. 출판사 사장인 아버지가 토마스의 재능을 탐탁치 않게 여김에도, 토마스는 여전히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며 뉴욕에 드물게 존재하는 낭만적인 부분을 깊이 탐구한다. 토마스는 대부분의 예술가 지망생들이 그렇듯, 자신의 삶 속에 드물게나마 존재하는 낭만을 사랑함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다.

 

그건 토마스가 자신의 인생을 권태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스스로의 인생이 무척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경험조차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지루한 인생에 대해서 토마스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토마스가 등장인물 중 가장 흥미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 지루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는 토마스의 인생에,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을 대사건이 일어나게 되므로. 토마스가 그 난데없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여러 영화에서 예술가의 전형처럼 그려지는, 예민하고 섬세한 인물들의 그것과 상반된다. 영화 초반 토마스는 <잉글랜드 이즈 마인>의 패트릭 모리세이 그리고 <월플라워>의 찰리처럼 관조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영화 말미에 이르러서는 스스로가 관조하던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그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택한다. 토마스는 괴짜지만 현실에 순응하는 법을 알고 내성적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적어도 사랑을 자각한 후에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토마스의 인생에 일어난 대사건이란 늘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아버지 에단의 불륜이다. 우연히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된 토마스는 적잖은 충격에 빠진다. 토마스는 그 길로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미행하기에 이르지만 아버지와 불륜을 저질렀던 여자, 조한나는 토마스에게 자신을 미행했던 것은 물론, 토마스가 에단(토마스의 아버지 이름)의 아들인 것도 알고 있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조한나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토마스는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후 토마스와 조한나는 카페에 앉아서, 장성한 아들이 있음에도 불륜을 저지른, 뻔뻔한 남자를 매개로 엮인 사람들다운 대화를 나눈다, 조한나는 불륜을 저지른 사람 같지 않게 태연하고, 오히려 조한나를 다그쳐야 할 토마스가 어색하고 위축된 태도를 보인다. 연륜의 차이라기엔 토마스가 다소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을 타고난 반면, 조한나는 팜므파탈의 전형으로 꽤나 활달하고 거리낌없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행동을 하곤 한다고 조한나가 말하자, 토마스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조한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나랑 자고 싶잖아. 조한나는 이런 엄청난 말을 할 때조차 태연하다. 토마스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토마스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한나를 미행하기로 결심했을 때 토마스는, 그녀와 자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보다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현실적인 욕구에 더 이끌렸을 테니까. 토마스가 아버지 에단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조한나의 주장을 근거 없는 억측으로 몰아갈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토마스는 사랑의 순수함을 믿는 인물이다.

 

<리빙보이 인 뉴욕>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아주 하찮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랑을 하는 반면 토마스는 유일하게 순수한 사랑을 믿으며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순애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토마스를 그토록 순수하고 순애보적인 인물로 그려낸 것은 조한나를, 아버지의 불륜 상대이며 곧 그의 가정에 위기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인물인 조한나를 순수하게 사랑했을 가능성을 표방하기 위함이다. 토마스는 물론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난잡한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토마스는 자신을 다 안다는 듯이 나오는 조한나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느꼈으며,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사랑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정으로 묘사된다. 토마스는 자신이 느꼈던 사랑을, 그 사랑이 향했던 대상을 폄하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그냥, 사랑을 할 뿐이다. 토마스 웹으로서.

 

*사랑할 때의 우리, 때로 '지긋지긋한'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렇다면 토마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대하는가. 토마스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 미미는 정열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을 원했다. 미미에게 뉴욕은 너무나 고리타분한 도시였고, 그 도시를 닮아 고리타분한 사랑만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토마스의 마음을 거절했다. 미미와 토마스는 <리빙보이 인 뉴욕>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젊은 편에 속한다. 사랑을 충분히 경험해 보지 못한 그들은 오랫동안 사랑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겪어 본 조한나나 에단과는 달리 자신이 바라는 그대로의 사랑을 할 거라고 믿는다. 그건 젊음의 특권이면서 미숙한 영혼만이 향유할 수 있는 가치이다. 그렇기에 미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도 사랑에 대한 얄팍한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그려지는 뉴욕은 로맨스의 성지인 동시에, '죽어버린' 로맨스적 환상의 무덤이다.

 

그러나 <리빙보이 인 뉴욕>은 토마스를 비롯한 인물들의 사랑법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뉴욕에서 살아가고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순수하게 보여주면서 뉴욕의 양면적인 특질을 강조한다. 미미는 그런 뉴욕의 양면에 걸쳐 있는 인물이다. 미미는 로맨스의 성지를 기대하지만 때로 지나치리만큼 현실적인 이 영화는 그녀를 환상의 무덤에 서게 한다. 그러나 미미는 그 괴리감에 잠식되지도,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탐닉하지도 않는다. 그녀 자체가 뉴욕의 양면성을 대변하기 때문에, 미미는 뉴욕의 양면에 걸쳐진 채로도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꾸려간다. 토마스를 만나고, 토마스를 거절하고, 자신이 바라는 형태의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조한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토마스가 내면의 욕망과 사랑에의 욕구를 자극하도록 도운 인물, 제럴드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방영되었던, 미국 시트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상이다. 일명 '옆집의 조언자.' 주인공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방금 전에 했던 바보 같은 행동을 꽤 격정적으로 후회하고 있는 시트콤 주인공에게 들려주기엔 지나치게 철학적인 대사를 몇 마디 읆어주곤 옆집으로 쏙 사라지는 인물.  그러나 '옆집의 조언자'로 남겨두기에는 제럴드의 캐릭터성이 너무나 풍부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사랑을 하는 <리빙보이 인 뉴욕>의 인물들에겐 공통점이 거의 없기에 조언자의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 등장해서 그들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제럴드는 어떤 인물보다도 풍부한 서사를 갖는다. 언뜻 보기에는 주인공 토마스가 시청자들에게 동정심 혹은 약간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배치한 작위적인 인물상처럼 보이지만. 제럴드의 서사는 매우 탄탄하고 이토록 획기적인 성장서사의 주인공, 토마스의 매력을 반감시키지 않는 선에서 조력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그런가 하면 토마스의 아버지 에단은 사랑에 있어 매우 자유롭다. 세심하게 사랑하는 토마스와는 대조적으로, 에단은 자신의 감정에 더욱 충실한 인물이다. 영화상에서 조한나와의 불륜은 에단의 무모하리만큼 열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소재로 사용된다. 조한나가 토마스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에의 욕구를 자극하는 인물이라면, 에단은 토마스에게 자신 내면의 욕망을 자각할 기회를 제공한 인물이다. 비록 에단의 자의는 아니었지만. 토마스가 조한나를 만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였던 경험이 크게 작용하므로. 에단의 사랑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토마스가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에단의 불륜이라는 대사건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조한나를 만나면서 사랑에 대한 토마스의 평가는 영화 전반에 걸쳐 토마스가 느껴야만 했던 수십 가지의 감정으로 연결되고, 그 수십 개의 감정들은 영화 말미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토마스라는 인물의 자아를 유기적으로 완성한다. 그렇게 토마스는, 비밀을 간직한 도시 뉴욕에서 살고 사랑하기를 원했던 소년 토마스는 제가 그토록 바랐던, 성숙하고 세심한 사랑에의 가능성을 확립한다. 조한나가 아니더라도,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뉴욕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랑에의 욕망을 자각한 토마스는 언젠가 성숙하고 현명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므로.

 

*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리빙보이 인 뉴욕>은 사랑을 계기로 조금씩 성장하는 미숙하고 순수한 작가 지망생 토마스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워, 사랑이라는 단순하고 일률적인 감정의 집약에 지쳐 있었던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근본적인 가치를 일깨운다. 막장의 요소가 함축되어 있는 영화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물론 있지만,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사랑하는 인물과 평범하게 사랑하는 인물이 영화 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사랑하는 인물과  비교적 평범하게 사랑하는 인물, 그들을 하나로 엮어 주는 매개체인 사랑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하기 위해 영화는 막장을 택했다.

 

에단과 조한나의 사랑, 그리고 토마스와 조한나의 사랑은 분명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각 인물의 내면적 성장을 보여주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토마스는 조한나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형태의 사랑을 원했는지를 자각하고, 조한나는 토마스라는 순수하고 미성숙한 인물을 통해 자신이 지향해 왔던 가볍고 자유로운 관계의 단점을 깨닫는다. 미미의 거절은 토마스가 사랑하는 동안에 반드시 행복을 경험하듯이 관계에서 받는 상처 역시도 필연적임을 깨닫게 하고, 에단의 사랑은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리빙보이 인 뉴욕>을 사랑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로 규정짓기에는 어폐가 있다. <리빙보이 인 뉴욕>은 토마스라는 인물이 사랑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리고 토마스뿐 아니라 조한나와 미미와 에단과 제럴드 역시 사랑에 대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고 있기에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예찬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랑 영화의 똑같은 플롯이 지긋지긋하다던 나의 친구, 그녀에게 이 영화는 지긋지긋한 플롯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사랑뿐 아니라 성장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하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리빙보이 인 뉴욕>이 바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알려준 영화이기에,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감정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는 <이프 온리>의 명대사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랑 영화에 감사를 전하기에는 <이프 온리>의 대사가 가장 적절하므로.

 

'사랑하는 법을 알려 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받는 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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