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나의 독서 칼럼] 새, 그들은 어떻게 날아야 하는가

 

 

우리의 삶 속의 새는 넓고 높은 하늘을 날며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그러한 ‘새’의 이미지 때문에 필자가 이 책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오정희 작가의 <새>라는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희망차고 설레는 그러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반전의 반전의 반전인 이야기, 필자는 그 반전과 함께 “새, 그들은 어떻게 날아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 작품은 열세 살 우미와 남동생 우일이가 주인공이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외할머니 집, 외삼촌 집, 큰 집에서 차례대로 돌봐지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우미와 우일이를 구박한다. 몇 해가 지나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데려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단란한 가정 같았으나, 새어머니는 우미와 우일이를 돌봐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결국, 새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그 사실을 안 아버지도 새어머니를 찾아야겠다며 집을 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우미와 우일이는 둘만 남겨졌고, 폭력과 무관심의 폐해를 온몸 곳곳에 가진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미는 구세주를 만나게 된다. 바로 학교에서 선임해준 상담 어머니이다. 상담 어머니는 우미에게 어머니 같은 애정을 준다. 그 애정이 상담 시간만으로 한정된다는 게 흠이지만 말이다. 우미는 상담 어머니와 자신의 눈이 닮았다고 하며 마치 상담 어머니가 정말 자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대한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우미에게는 상담 어머니가 그 공백과 아픔을 채워주는 존재일 것이다. 나중에 우미가 상담 어머니 집에 찾아갔을 때, 우미는 상담 어머니가 실제로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상담 어머니가 그녀의 진짜 딸에게 우미를 ‘불쌍한 애’라고 말한 것을 듣게 된다. 우미 만의 세계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우미의 세계를 조금 더 바른 세계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 그 존재가 우미에게는 상담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참하게 우미의 기대를 짓밟아버리는 상담 어머니도 결국 똑같은 어른이었다. 우미는 또 버려진 것이다. 또 혼자가 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상담 어머니가 우미에게 아는 척을 했을 때 우미는 상담 어머니를 모른 척한다. 우미는 정말 상담 어머니라는 존재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필자는 우미가 상담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잊었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우미랑 우일이는 계속 기억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떠난 어머니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와의 기억들도 계속 사라진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상처가 된 여러 기억을 잊어간다. 우미는 상담 어머니가 자신의 공백과 아픔을 채워주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상담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우미라는 아이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이것이 우미에게 상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미가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우일이는 항상 날고 싶어 한다. 우일이는 자신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어디서나 뛰어내린다. 어렸을 적 뛰어내렸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우일이가 날지 못하는데 자신이 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작가가 남매의 처참한 삶을 나타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남매는 자신들이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독립했다고 생각한다. 남매뿐이어도 먹고, 자고, 배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그저 가난이라는 장애물만 있을 뿐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으로 보기에는 남매의 처참한 삶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필자는 도움이 필요한, 완전하지 않은 독립의 모습이 우일이가 나뭇가지에 걸린 것을 날았다고 믿고 어디서나 뛰어내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 이름 짓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 이름 지어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렇게 부르던 마음이 이제사 내게로 와 들리는가 보다.’ 이 작품 마지막 장의 마지막 줄이다. 괜스레 눈물이 난다. 어쩌면 우미와 우일이 둘 다 ‘새’일지도 모른다. 우일이는 새처럼 날고 싶어 했고, 우미도 어쩌면 날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어둡고 갑갑한 새장에서 나와야 하는지,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새장 속에 갇혀 학대를 당하고 무관심 속에 살아왔지만, 훨훨 날고 싶다는 희망만 가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새. 이들은 과연 어떻게 날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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