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빈의 영화 칼럼] 애증에 대한 기록

<마미> -우리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제발 그만해 둘 수 없어?'

 

방학을 맞아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지금, 내가 엄마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그만해 달라고!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싸웠고 때로는 싸우게 된 이유가 너무 터무니없어서 절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죄책감 같은 걸 가질 줄 알아. 절대 엄마가 원하는 대로 안 할 거야. 십대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반항심과 부모에게 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이 합쳐져 만들어낸 부정적인 결과라고나 할까. 정말 심하게 싸운 날에는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다 엄마가 나한테 간섭하려고 들어서 벌어진 일인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해? 라는 건방진 생각도 했었다. 엄마랑 정말 다시 안 볼 처럼 싸우는데도 매일 식사 시간마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가끔은 서로 너무 애틋해서 우리가 가족이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혹시 엄마에 대한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내가 문제인 걸까?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데.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을 어떻게든 정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자비에 돌란의 <마미>라는 영화를 소개받았다. <마미>를 보기 전까지 돌란 감독에 대한 내 이미지는 '칸의 총아' '어린 나이에 데뷔한 천재 감독' 외에 별다른 것이 없어서,  '최소한 칸의 총아라는 별명 값은 하겠지' 라는 생각을 했을 뿐 별로 기대를 갖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가족 이야기를 하기에 저 감독은 너무 어리다 싶었고, 가족에 대한 애증을 저렇게 어린 감독이 과연 제대로 풀어내겠느냐는 회의감 또한 가졌었다. 감독의 역량에 대한 불신과 영화에서 과연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미처 제거하지 못한, 일종의 신경과민 상태로 나는 <마미>를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인생에 '엄마'라는 존재가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나는 엄마의 일생에 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고찰할 수 있는 훌륭한 영화였다. 지금부터 '엄마'라는 존재에 애증을 품고 있는 모든 자식들의 이정표가 될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마미>는 특이하게도 1:1 비율의 화면을 고수한다. 정사각형 틀 안에서 펼쳐지는 애증의 세계. 문득 검은색 펜으로 화면에 몇 개의 선을 긋는다면 감옥 창살과 꼭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1 비율의 정사각형 화면은 엄마라는 존재가 마치 감옥처럼 느껴지는 많은 자식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일까. 그걸 의도했다면 정말 천재 감독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1:1 비율의 화면에 익숙해지는 동안 그 화면 속에서는 '엄마'가 시설에 맡겼던 아들을 집으로 다시 데려왔다. 아들의 이름은 스티브. 그의 아버지는 오래 전에 죽었고 지금 그를 데리고 나온 엄마가 유일한 가족이다. 엄마의 이름은 디안.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된 그녀는 간단한 번역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디안이 아들 스티브를 집으로 데려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스티브가 시설에서 사고를 쳤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다치게 할 우려가 있는 큰 사고였기 때문에 스티브의 처분이 논의되고, 아들을 감옥에 보낼 수 없었던 디안은 스티브를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아들과 현실의 무게에 지쳐버린 엄마가 다시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스티브가 시설에서 생활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남편의 죽음 이후, ADHD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들 스티브를 혼자서 돌볼 수 없었던 디안은 그를 시설에 맡긴다. 혹자는 아들을 돌보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라며 디안을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디안이 현명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역시도 자신을 시설에 맡겼다는 이유로 디안을 비판하지 않으며, 엄마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줄 모르는 점은 꼭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 같다. 현실에 짓눌려 살아가지만 디안 역시도 스티브를 몹시 사랑하고, 디안과 스티브 모자는 스티브가 시설에서 막 나왔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모자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이어간다. 모자의 세계에 카일라라는, 말을 약간 더듬으며 원래 직업은 교사였다는 여성이 등장하면서 셋이 행복한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생긴다. 디안은 카일라에게 스티브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스티브는 카일라를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영화 초반부를 감상하는 동안 나는 '결국 엄마와 아들이 함께 지냄으로써 모든 갈등이 풀리는 건가? 그렇다면 너무 영화적이고, 현실과 뒤떨어지잖아.' 라는 생각을 했다.

 

1:1 비율의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지나치게 영화적인 이야기와 어딘지 거북한 모자 관계. 폭풍전야일까? 곧 갈등이 펼쳐질까? 나는 내심 기대했고 정사각형 화면 속 세상은 여전히 잔잔하고 하늘만이 유독 새파랬다. 새파란 하늘이 정사각형 화면을 아쉬워하게끔 만든다. 화면이 조금 더 넓었더라면, 하늘이 잘 보였을 텐데. 감독은 바로 이 부분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의도였나 보다. 관객이 좁은 화면에 아쉬움을 갖기 시작할 때, 영화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장면을 집어넣는다. 스티브가 보드를 타는 장면, 극 중에서 아무런 서사도 갖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영화에 의미를 더해주는 장면이다. 스티브는 보드를 길 위에 살짝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내 스티브는 보드를 탄다. 자유롭게.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처럼, 언젠가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를 거라 믿는 듯이 자유롭고 거칠게 보드를 탄다. 어미의 날개 그늘을 벗어난 새끼 새의 첫 비행처럼도 보이는 장면이다.

 

이후 스티브의 손짓에 맞춰 정사각형의 화면이 활짝 열리고,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흘러나온다. 'Because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who saves me.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 이라는 후렴구에서 묘사하는 구원자의 이미지와 바람을 맞으며 보드를 타는 스티브가 겹쳐 보이면서 나는 문득 '결국 우리 모두에게 엄마는 Wonderwall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심슨 가족>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다. 딸인 리사가 엄마인 마지에게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가, 엄마가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사실은 엄마처럼 되고 싶었다고 엄마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리사는 여전히 마지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를 위해서 나중에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거짓말을 한다. (22시즌 5화. Lisa simpson, This isn't your life 내용) 엄마는 어쩌면 나를 구원할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결국 나의 Wonderwall이지만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고 엄마가 내 인생의 걸림돌이라고 느끼며 때로는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그렇게 증오하는 엄마를 위해서 살아간다. 엄마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마미>의 결말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현실적이다. 스티브가 보드를 타면서 화면을 활짝 열어젖히는 장면 이후, 감독은 준비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이 거듭되는 갈등으로 관객의 정신을 빼놓는다. 디안이 스티브에게 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며 제발 자기를 좀 쉬게 해 달라고, 참았던 말들을 토해내는 장면에서 '이 감독 엄마랑 정말 지겹도록 싸워봤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너무 많이 참고 자식은 너무 안 참는다. 그래서 싸운다. 엄마는 참았던 말들을 한꺼번에 토해내고 자식은 참지 않고 마구 쏘아붙이다가 엄마에게 폭탄을 맞고서 대체 뭐가 문제냐, 혹은 왜 에전 일로 나를 힘들게 하냐며 울분을 터트린다. 돌란 감독이 묘사하는 갈등의 장면에는 이 모든 특징이 소름이 끼칠 만큼 자세하게 재현되어 있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 스티브는 엄마와 화해하려고 하지 않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언젠가는 엄마도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하지만 나는 항상 엄마를 위해 살게.' 스티브와 돌란 감독,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나를 포함해서 모든 자식들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고, 나도 엄마가 밉지만 엄마를 위해 살겠다는. 왜냐하면 엄마는 나의 엄마이니까.

 

<마미>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가 했던 생각은 '돌란 감독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였다. '엄마'라는 존재가 저 사람의 일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길래 저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저 사람은 '엄마'를 미워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사랑하는 걸까? 나는 엄마를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엄마를 온전히 미워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고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때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엄마를 미워하고 있었다. 돌란 감독도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애증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까? <마미>의 스티브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엄마라고 영화 전반에 걸쳐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스티브가 엄마를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한다고 느낀다. 스티브의 몇몇 행동들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파괴적이므로. 나는 스티브에게 많이 공감했고, 디안의 행동들에 스티브와 함께 상처받으면서 엄마는 나에게 늘 바라던 이상향과 같은 존재임을 느꼈다. 늘 꿈꾸고 바라지만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한, 그런 이상향. 그러나 너무 간절히 원했기에, 몰아치는 역경에도 포기할 수가 없는.

 

나에게 <마미>를 추천한 친구 덕분에 내가 엄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재정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듯이, 엄마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과 증오인지 사랑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 위에서 말했듯 '엄마랑 정말 제대로 싸워본' 것 같은 감독이 현실감 있게 만든 영화인 만큼, '저거 우리 집 보고 만들었나' 싶게 공감되는 장면들로 넘쳐나니까.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나는 엄마와 싸울 것이고, 어쩌면 엄마는 대체 왜 우리 엄마인가를 고찰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왜 그토록 엄마를 애증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얻었다. 바로 나의 엄마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애증한다.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우리가 엄마와 딸로 만났기 때문에. 이쯤에서 칼럼을 마치려 한다. 많은 자식들이 엄마에 대한 애증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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