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의 독서 칼럼] 최현우의 ‘코’ 를 가슴에 담다

‘좌절 끝에 보이는 희망의 메시지를 말한다’

막연히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서점에 들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정신없이 보낸 나의 삶에 고급스러운 향수를 살짝 뿌리는 기분으로 한 편의 시를 읽었다. 그 제목이 눈에 띄어 읽게 된 최현우 님의 ‘코’. 그냥 그저 그렇게 그 의미를 찾아보려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를 내려놓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시속 아이의 모습을 하나하나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행동에 담긴 그 마음을 읽기 위해 집중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코’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의 시선으로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었다.

 

아이는 사람의 밥과 사람의 말과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했다. 아이는 품에 안겨 잠이 드는 사람의 이마에 키스할 때 상처를 내는 자신의 입술이 싫었고 사람의 눈물이 묻으면 썩어버리는 피부를 대패로 밀어 잘라낸 입술과 함께 자루에 담아 두었다.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항구로 갔다. 방파제에 앉아 별이 떨어졌다던 먼 섬을 가리켰다. 고뇌하던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발목이 부서졌고 그때 깨달아 매일 바다를 마시고 정강이를 부러뜨려 모아 두었다. 아이는 자신의 다리들을 줄로 엮고 모아둔 피부를 바르고 뱃머리를 입술로 장식하여 작은 조각배를 만들 수 있었고 배를 선물 받은 사람은 기뻐했으나 저어갈 노가 없었다. 아이는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길고 단단한 코를 가질 수 없었고 상심한 아이는 사람에게서 도망쳐 나는 왜 사람이 아니냐고 소리 지르고 다녔다. 어느 날 사람은 미움을 받아 세상에서 숨어버린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가 침대 위에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 길고 튼튼한 노를 발견했다. 아이가 먼 섬으로 갔을 것만 같아 항구에 조각배를 띄우고 그날부터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번쯤 피노키오를 타고 떠나왔다…. ‘코’ 최현우 저 전문

 

 

 

아이(피노키오)는 사람의 모습이지만 사람이 아닌 나무 인형이었다. 사람의 형상으로 그들의 삶 속에 있고 싶지만,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아이는 끊임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언제가 나도 그렇게 될 거란 간절함으로 내 모든 것을 바쳐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이에게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에 대해 인식할 여유 없이 자신이 바라본 대상에 대한 존재감에 모든 무게감을 실은 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대상에 너무 목말랐던 그의 모습이 안쓰럽고 외로워 보인다.

 

한편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산다는 건 아이가 그의 삶에 적응하고 나름의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는 생각에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아이의 간절한 바람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이의 존재감을 그 누구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가 너무 가엽고 또 가엽다.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누군가에게 너무 당연하다 면 왠지 공평하다는 생각에 화도 난다. 만약, 그의 주변에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삶의 모습이 조금 덜 조심스럽고 조금 덜 처절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스스로 바라는 간절함에 주저함 없이 자신을 던져갔던 그의 모습은 용기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스스로 자신의 것을 대패로 밀어 잘라내는 아픔을 감당하며 자루에 묻어두는 모습은 그의 바람이 얼마나 무서울 만큼 강렬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여기에 문장마다 묻어있는 아이의 거침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 얼마나 아낌없이 나를 던져 보았는지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글의 읽을수록 진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이가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위해 자신을 과감히 던져가는 과정이 더없이 힘들게 느껴졌고 처절하게 보였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모습, 그들을 위해 고민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 읽는 내내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봐야 했다. 그들과 같이 되고 싶다는 꿈으로 그들과 함께 조화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확신할 수 없는 현실로 ‘노심초사’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 나와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모습이 있을 것 같아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막연히 타인의 시선에서 읽어 갔던 글이 반복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점점 나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마치 내가 꿈꾸는 소중한 것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아이와 같았고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해 가는 모습이 나와 같다. 그래서 이 글은 더 깊이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삶의 과정으로 공감 층이 넓고 깊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이 시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아이가 할 수 있는 그 끝은 어디일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아이는 다시 매일 바다를 마시고 정강이를 부러뜨려 그 다리를 모아 줄로 엮었고 모아둔 피부를 발라 뱃머리를 입술로 장식하여 작은 조각배를 만들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어갈 노를 만들어야 했던 아이는 길고 단단한 코를 만들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야 했다. 어디까지 해야 했을까? 그 한계에 부딪힌다. 결국, 사람에게서 도망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여기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래, 잠시 너를 스스로 위로할 수 있길 바라고 응원한다!’ 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이는 얼마나 자신의 지쳐가는 모습을 외면한 채, 버티기만 한 걸까? ‘아이에게 힘들게 해내 가는 자신에게 위로할 시간이 내주어졌다면’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내가 나를 위로한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섬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에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하다. 아이도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자신을 알고 있어선지 ‘나는 왜 사람이 아니냐!’ 고 절규하는 모습에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예측할 수 있었고 억압했던 자신의 힘든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에 오히려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그것을 다 쏟아내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아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다.

 

 

나 역시 나의 꿈을 꿈꾸며 나를 하나하나 던져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러나 나에겐 희망이 있기에 버틸 수 있고 또 이겨내야 한다. 때로는 ‘나의 한계’라고 스스로 정한 경계선에 부딪힐 것이고 무엇보다 그것을 현실에서 확인할 때, 좌절감도 느낀다. 그동안 미처 몰랐던 나의 부족함을 확인할 때마다 당황하기도 하고 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좌절감도 지치는지 나는 그 늪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그리고 또 다시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과정을 걷는다. 아마 아이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언젠가 아이가 다시 찾아온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아이와 나는 아직 삶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앞으로 이렇게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서서히 내가 바라는 것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와 우리들은 많이 닮았다. 그래서 읽는 동안 아이의 마음인지, 나의 마음인지 선명하지 않았다. 아이가 모든 것을 놓고 어딘가로 훌쩍 떠났던 모습에 ‘그동안 아이가 견뎌 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이가 만들어 낸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어딘가에 있을 아이를 찾아 떠나는 모습에 아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아이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코’마저 그는 아낌없이 주었고 나는 그 모습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를 찾았다. ‘코’는 바닥까지 긁어 만들어낸, 그래서 결국 나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던 노력의 결정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록 그것이 바로 빛을 내지 못해도 ‘나 자신을 믿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나를 알아볼 누군가가 나를 찾아 나설 것이란 희망의 메시지를 나는 믿는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