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빈의 시사 칼럼] NORTORIOUS RGB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녀는 누구인가

Ruth Bader Ginsbur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한평생 여성 인권, 법치주의,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요구해왔던 사람이다. 1993년부터 미국 연방 대법관이자 페미니스트로 활동해온 그녀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9월 18일 8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비록 겉으로는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크게, 강렬하게 목소리를 냈던 베이더를 기리고자 이 칼럼을 작성하게 되었다.


시작은 1970년도 성 평등에 대한 법적인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여성해방이라는 법대생 토론회에 소개와 진행을 맡게 되었던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신문에 글을 쓰기도, 성차별 문제를 다루는 과목에서 교수로 가르치게 되었다. 이어 그녀는 성 평등 소송에서 주목받는 법률가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 법대 최초로 종신 교수가 된 후 여러 분쟁, 사건들을 보며 차례 집을 내놓기도, 대법원 소송에 관여하며 여성과 성 소수자들의 인권 강화에 힘을 쏟았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을 긴즈버그를 연방 항소법원 워싱턴 디시 판사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진보주의 성향을 기르게 되었으며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 후임의 자리에 올랐다. 1

 

대법관으로서의 그녀를 살펴보자면 먼저 대법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 대법원의 법관은 논란이 되는 법령이나 주 정부와 연방정부와 같은 분쟁, 집행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의 권한을 가족 있는 지위로 종신직이며 본인이 은퇴하거나 죽기 전까지 계속 일할 수 있다. 여기서 법관은 보수와 진보 성향으로 나눌 수 있게 되는데 이 중 긴즈버그는 진보주의자로 새로운 세상의 평등을 외쳤다. 대표적인 업적을 살펴보자면 그녀가 대법원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6년  버지니아사관학교가 여학생을 받지 않은 사건에 대한 소송이었다. 긴즈버그는 미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의 훈련을 충분히 완수할 수 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입학이 거부되는 것은 부당하며 평등권에 위배되는 행위임을 주장하며 성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개인의 능력에 따라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2015년 동성 결혼 합법화 판결문에서는 결혼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할 시대라고 하며 직접적으로 법을 바꿔나갔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낙태권부터 동성혼의 합법화와 같은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흑인, 백인, 아시아인, 성전환자, 동성애자, 즉 모든 미국인의 평등을 외치며 삶을 바꿔놓았다. 미국에서의 권리, 정부의 역할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준 것이다.

 


나는 사실 RGB라는 사람에 대해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기존에는 미국 정치, 아니, 한국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찾아봐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이러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정치, 법이 단순히 국회의원과 다툼이 아니라는 것을 긴즈버그의 헌신, 열정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으며 인권 변호사라는 진로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노력으로 오늘날 여성들과 성 소수자들이 존중받는 미국 사회가 만들어졌으며 시대의 변화, 흐름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으로서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해주었다. 하지만 한국을 살펴보면 미국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 그리고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각각 153개국 중 118위 2 , 27개국 중 25위 로 다른 선진국뿐만 아니라 저개발국가보다도 떨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슨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주 인권의 존중과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계화 시대 속에서 긴즈버그처럼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인권을 보호하고 편견을 없애며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며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살아생전 남긴 말로 끝낸다. “의식적인 편견은 가장 벗어나기 힘든 일 중 하나다. 나는 교향악단을 자주 예시로 들고는 한다. 내가 자랄 때 오케스트라에는 여자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이 여성과 남성이 연주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똑똑한 사람이 간단한 해결책을 고안했다. 오디션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사이에 커튼을 치자는 거였고, 그렇게 해봤던 거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여성들이 교향악단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 인용: https://www.voakorea.com/episode/ruth-bader-ginsburg-224651

2. 참고: https://news.joins.com/article/23663187

3. 참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50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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