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찬의 역사 칼럼] 저출산 문제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인 것 같다. 코로나로 학교를 가지 않는 평일 낮에 어머니와 집 앞 공원을 산책해 본 경험이 있다. 그 시간에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공원에서 운동도 하시고 친구분들과 모여 계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출산율이 줄어 아이들의 숫자는 크게 줄어든 반면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령 인구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의 인구 비율이 2.9%였는데 2000년에는 7%를 넘어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령화가 계속되면  2018년에는 고령사회, 2026년에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1,2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저출산을 걱정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서 흥미롭다. 한국국학진흥원 연구 사업 팀이 펴낸 '조선의 결혼과 출산문화'(은행나무)를 통해서 살펴보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가난한 조선시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 N포 세대'가 조선에도 있었던 것이다. 가난 때문에 저출산 문제가 국가적인 문제가 되자 조선 시대 관리들은 미혼 남녀를 조사해 중매하고, 결혼 자금으로 500냥과 혼수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양민의 증가는 곧 농사일에 보탤 노동력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곧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층민 사이에서는 열 살 미만의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15세 전후에 결혼시키는 예부제 풍습도 있었다. 어린 며느리를 키워 노동력을 보충했고 나중에 친정에 대가를 치르는데 이는 혼인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양반층에게는 혼인과 출산이 가문의 존속이 달린 문제였다. 빨리 후손을 얻기 원했던 양반들로 인해 결혼 연령은 점점 내려가서 1800년 후반에는 남성의 평균 혼인 연령이 15.5세가 되었다. 가난 때문에 국가의 중매로 힘겹게 결혼해야 했던 하층민과 달리 양반은 집안끼리 마음만 맞으면 청혼서 발송부터 혼례를 치르는 일까지 10일안에 끝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정절과 가문을 중시해서 양반가 여성들은 남편이 일찍 죽더라도 재혼을 금지했다.3

 

예나 지금이나 저출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은 경제적인 이유다. 조선시대에도 잘 사는 양반들은 손쉽게 결혼하고 고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양민들이나 천민들에게는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혼인과 결혼에서 조차 공평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즘에도 직장에 취직이 힘들어서 또는 아파트 가격이 너무 비싸서 결혼을 포기하고 또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사교육비가 부담이 되어서, 여자들이 맞벌이를 해야 해서 등의 이유로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들이 있다. 부부의 자유의지로 아이를 안 낳는 것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으나 아이를 낳고 싶은데도 낳지 못하는 부분들은 정부가 더욱더 면밀히 조사해서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문제는 부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전세마저 동이 났다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이 앞선다.

 

참고 및 인용자료 출처

1.인용 : https://utokpia.tistory.com/1768
2.참고:http://www.edunet.net/nedu/contsvc/viewWkstCont.do?clss_id=CLSS0000000362&menu_id=81&contents_id=0e633d38-49fe-484e-b9ba-33b7f5c58ffd&svc_clss_id=CLSS0000018024&contents_openapi=naverdic

3.인용 :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1026/1036224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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