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영의 독서 칼럼]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보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하여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잣대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잣대 속에서 누군가는 완벽한 선의 모습을, 누군가는 추악한 악의 모습을 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다. 특히 사람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속마음을 감춘 채 선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행위를 타인에게 들킨 사람은 ‘이중적이다.’라며 비난을 받지만 사실 비난을 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음습한 부분을 숨긴 채 사회인으로서 생활한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며 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나를 보여줘도 될까?’라는 계산적인 삶은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지킬박사는 자신을 완벽히 선과 악으로 나누기로 결심한다. 지킬박사는 실험 끝에 자신의 자아를 분리하는 데 성공하고, 대외적인 인물인 ‘지킬’과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이드’로 두 가지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있듯 지킬박사는 파멸의 길을 걸었다.

 

지킬박사의 파멸은 지킬박사의 안일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지킬박사는 지킬과 하이드를 완벽한 남이라고 생각하였고, 하이드가 저지른 악행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킬이 하이드로서 자신의 본성을 표출할수록, 하이드의 힘은 세졌고 결국 지킬박사는 지킬의 자아로 돌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본능의 쾌락을 한번 맛본 사람은 다시 고고한 척 위선떠는 사회인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지킬박사는 책의 끝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인간을 완벽히 선과 악으로 분리하고자 했던 지킬의 실험은 획기적이었지만 결국 최소한의 선조차도 없는 악과 본능적 쾌락에 잠식되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이야기>의 저자 루이스 스티븐슨은 이중적인 지킬박사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위선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위선이 정말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일까?

 

오늘날 인간의 위선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모두 내비치는 사람을 이기적이고 눈치 없다며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위선 속 본 모습이 들통나면 사람들에게 ‘이중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우리는 그 이중잣대 속에서 자신을 남들에게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위선이 사회생활의 필수 도구인 것처럼 인간의 이중성 역시 당연한 부분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속에 감추어진 비밀들이 있고 상황에 맞추어 그것을 꺼내기도, 꽁꽁 감추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중성을 넘어서 다중성을 지닌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나보다 높은 사람과 친구를 똑같이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중성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어느날, 누군가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해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이중적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