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호의 사회 칼럼] 이민을 받아야 될까

 

 

1)난민들은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다.  자기가 살던 고향이 아무 영문도 모른채 쑥대밭이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순식간에 잃은 채 살기위해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는 처지이다. 이런 난민들이 살기위해서 중동쪽 난민들은 작은 고무보트에 수십명이 탄채로 지중해를 표류하다가 전복되어 유럽 해안가에 시체로 떠밀려 온다. 이민자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제 3국으로 가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이해하지만 단순히 동정심만으로는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얼마전에 프랑스에서 한 역사교사가 길거리에서 참수당한 사건이 있었다.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역사시간에 보여줬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에 수업을 듣던 무슬림 청년이 분노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공존의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인간들은 각자 수 많은 시간동안 흩어지고 모여 자신의 그룹만의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문화는 수세대에 걸쳐 이어졌기에 그들 사이에서는 당연하다. 이런 그룹들이 국가를 형성해서 현대사회까지 넘어왔다.수백년의 문화들끼리 부딪치면 같이 상성할 문화들도 있긴 하지만 매우 소수다. 당장 다문화 가정 아이도 편견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 있는데, 과연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받을 수있을까? 

 

기본적으로 공존 실패의 결과는 갈등과 분쟁이다. 내전, 분란을 피해서 온 다른 난민들이 공존을 실패하면 또 다시 갈등과 분쟁으로 제 3의 일어날 필요도 없던 난민들이 생겨나게 된다. 유럽을 보라. IS가 한참 성행할때 축구경기가 일어나는 경기장 앞에서 폭탄 테러가 성행하고, 파리 한복판이 난장판이 되고, 벨기에의 수도도 테러가 일어났다. 이것들은 단순히 개별 각각의 원인이 있던 것이 아니다. 공통적인 이유다. 난민 수용이다. 위험에서 구출하려는 나라가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은 모순적이다. 자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삼고 난민 수용을 해야할까?

 

유교사회가 뒷받침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분명하게 남아있는 관습들은 외부문화에 민감하다. 갈등 유발하기 쉽다. 이런 우리나라의 문화들과 앞서 난민들을 받아왔던 여러 국가들에서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의 테러의 사례들을 보면 난민을 받을 수 있을까? 당장 힙합문화만 봐도 자신의 돈 자랑과 성적가사들이 대부분인 본토힙합을 수용하는데도 오랜시간이 걸렸다. 유교라는 알러지는 불치병이였고, 앞으로도 쉽게 고쳐지지않을 것이다. 자잘한 문화의 수용도 버거운데 거의 문화가 상반된 난민들과의 섞임은 굉장히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참고1)https://www.voakorea.com/world/asia/korea-refugee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