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의 독서 칼럼] ​누구의 잘못인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과연 부유층의 문제인가

가끔가다 보면 "00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나는 '새로 생긴 신조어인가 보다'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도서 제목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그래서 난 이 책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이 얼마나 재밌길래 여러 곳에서 사용될 만큼 유명해졌을지도 궁금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고통받는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쓴 책이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가 읽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렇다. 난쟁이 아버지를 둔 소외계층 가족의 돈벌이와 재개발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고, 그래서 사회에서 받는 비난까지 담아냈다. 이 가정의 아들딸은 정식 교육을 받다가 돈이 없어서 은강 기업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식 일자리 없이 이곳저곳에 일하러 다니다가 공장 옥상에서 자살하게 된다. 그러면서 당하는 차별, 돈을 벌기 위한 행동과 인물의 감정을 보여준다. 노조가 존재함에도 노조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해 부당한 대가를 받은 큰아들은 결국 은강기업 회장 동생과 진짜 회장을 착각하여 죽이게 된다. 결국 난쟁이 가족의 장남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조건 부유층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러나 그 부유층들은 노동자들의 속 사정을 몰랐다. 그들이 독불장군처럼 노동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행동한 것은 맞다. 충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와도, 처음 가진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아 노동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맞다. 그러나 소설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공장을 세워주고 일자리도 주고 돈도 준다. 들어온 건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에 무어라 해서는 안 된다.' 지금에야 이 말은 틀리지만, 그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윤리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사실 난 이 문제만 아니더라도 이렇게 많이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난쟁이의 장남이 저지른 '살인'이다. 이 노동자들이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은 사실이다.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싸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정의는 정의로운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살인은 정의롭지 못한 방법이다. 통합사회 시간에 롤스의 '시민 불복종'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 안에서도 '비 폭력성'이 존재했다. 지금 이 문제에서도 그것이 빠졌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은 살인이 아닌 그 외의 방법을 찾아 나갔어야 했다. 그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그 장남의 분노 하나였다.

 

 

이 책을 이해하기엔 조금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역시 통합사회 시간에 노동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노동 보장이 잘 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책의 시기와 같이 이전에는 보장이 잘 안 되어 있다고 하셨다. 사실 공감은 잘 안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나에게 이 책은 같은 학교 언니가 느낀 <소나기>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언니가 대학교 면접을 볼 때, 소나기가 초등, 중등, 고등이 되어 읽을 때 생각이 다 달라서 기억에 남았다고 이야기했었다. 나 또한 커가면서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 같다. 한번 읽고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을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나온 적이 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부분이었다. 처음에 '이 얘기가 왜 나오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글을 쓰며 갑자기 느끼게 되었다.뫼비우스의 띠는 앞뒤의 경계가 있지만 없다. 앞뒤가 연결되어 결국은 모든 게 앞이 되고, 모든 게 뒤가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이해했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는 것, 사실 따로 같아 보이고 반대 같아 보이지만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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