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다은의 영화 칼럼] 벼랑 위의 포뇨에서 벼랑 끝의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

 

'벼랑 위의 포뇨'라는 애니메이션을 들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명작 중 하나인 '벼랑 위의 포뇨'는 그저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나도 어렸을 때 처음 이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때는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다시 시청하니 우리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공유해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서 이 글을 쓴다.

 

'벼랑 위의 포뇨'는 '어린아이 배려와 존중'이라는 우리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담고 있다. 이 가치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경시되고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노키즈존'과 같은 어린아이의 접근을 막는 것은 물론, 각종 혐오 발언도 인터넷 상에 만연하다. 하지만 '벼랑 위의 포뇨' 속 마을 주민들은 다르다. 우선 주인공인 소스케의 엄마가 가장 대표적이다. 사실 소스케의 엄마는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양로원에서 일하며 폭풍우를 뚫고서라도 양로원의 노인들이 걱정되어 소스케를 놔두고 그들을 돌보러 갈 만큼 약자 배려 의식이 뛰어나다. 우선, 소스케가 금붕어가 돌아올 때 자신의 집을 찾기 쉬우라고 양동이를 집 앞에 걸어놓겠다고 했을 때, 그저 정리하기 귀찮은 일을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스케의 엄마는 "그렇게 해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렴."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른이 어린 아이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어른이 어린아이의 생각과 논리구조를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존중하고, 어른으로서 포용해준다는 뜻을 내포한 저 말을 해줄 수는 있다.

 

소스케의 엄마는 또한 처음 보는 포뇨를 기꺼이 자신의 집에 받아주었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돌봐준다.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이 세상에서 이런 태도는 가히 존경스럽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범죄가 많아진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소스케의 엄마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포뇨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포뇨는 살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포뇨는 소스케의 소개대로라면 금붕어가 변해서 된 아이이다. 이런 소스케의 말을 보통은 무시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금붕어가 인간으로 변했다니! 하지만 소스케의 엄마는 이를 전혀 의심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소스케의 엄마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 모두가 어린아이 존중의 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포뇨와 소스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만난, 한 가족은 처음 보는 포뇨가 주는 수프를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먹는다. 심지어 자신의 갓난아이에게도 먹인다. 이는 처음 보는 아이가 주는 음식을 먹었을 때 위험이 생길 가능성보다 자신의 수프를 내민 포뇨의 호의와 동심의 가치를 중시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배를 타고 가던 마을 주민들 모두가 소스케를 응원해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소스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 정신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나만 해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니 말이다. 

 

소스케의 집은 벼랑 위에 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벼랑 위의 포뇨'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다른 의미로 벼랑 위에 있다. 각종 혐오와 이기심이 만연하고 갈등은 인터넷을 타고 극에 달하고 있다. 매일같이 그런 갈등을 마주하다보니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럴 땐 '벼랑 위의 포뇨'를 보고 다시 한 번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진정 어린아이와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고 혐오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사람은 대부분 갓난아이로 태어나 노인으로 죽는다. 즉, 약자로 태어나 약자로 죽는다. 이런 의미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단지 강자인 나의 배려나 동정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