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다은의 역사 칼럼] 동학농민운동 기념일을 아시나요

 

 

지난 6월 14일,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이자 전봉준 장군의 고향인 고창군에 전 장군의 동상을 세우는 범군민 운동에 2억원 넘는 성금이 모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1 단순한 재정 지원이 아닌, 시민들이 동학농민운동 정신을 기리고 이를 이어갈 동상 건립의 필요성을 느껴 선뜻 성금을 모았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내 주위, 아니면 사실 나까지도 그동안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그저 시험을 위해 외워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해왔다. 사람들이 두 달 전에 있었던 동학농민운동 기념일을 알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이러한 인식을 변화하기 위해 나부터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학농민운동 기념일에 대한 것을 알아보았다. 

 

5월 11일은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날로, 초기에 승리하여 이후 동학 농민군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중요한 날이다. 이에 5월 11일이 동학 농민 운동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주 화약을 체결한 음력 5월 8일을 동학 농민 운동 기념일로 지정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첫째, 전주 화약에서 집강소의 설치가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설치는 봉건적 사회에서 탈출하고 근대적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정부가 집강소 설치를 허용한 것은 당시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집강소는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실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 폐정 개혁안은 백성이 폐정의 내적, 외적 문제점을 지적해 개혁을 요구한 것으로, 민주주의의 움직임이 싹텄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둘째, 정부에서도 전주 화약 이후 교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한 정부가 자주적인 개혁을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농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혁을 시도한 것은 지배층이 백성의 목소리를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므로 의미 있다. 또한 자주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은 당시 외세의 개입에서 벗어나려는 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셋째, 전주 화약은 청과 일본 등 외세의 개입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체결하였고, 이후 동학 농민군이 자진 해산하였다. 이를 통해 폐정 개혁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동학 농민 운동의 반외세적 성격을 알 수 있고, 이는 외세의 개입을 피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자주적이다.

 

전주 화약에서는 전라도 지방의 개혁 사무를 담당할 자치 기구인 집강소의 설치와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 실시가 합의되었다.2  이후 농민군이 외세에 반발하여 2차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나는 전주 화약이 이러한 이유로 중요하고, 따라서 전주 화약 체결일이 동학 농민 운동 기념일로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자체를 기억하는 일이다. 기념일 자체도 동학농민운동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지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5월 8일이 되었든, 5월 11일이 되었든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각주

1.참고 출처: https://news.v.daum.net/v/20210614172653271
2.인용 출처: https://daily.hankooki.com/lpage/society/201503/dh2015030214461413789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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