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나의 문학 칼럼] 운명 속에서 비상하라

희곡 '이만희, <돼지와 오토바이>'

 

 

'운명이란 무엇일까?'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낯 간지러워지는 질문 아닌가? 조금은 구닥다리 질문이기도 하다. 우습게도 이만희의 <돼지와 오토바이>는 그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질문에 대한 답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오토바이에 탄 돼지와 낙상매(落傷鷹)가 등장하여 필자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오토바이에 탄 돼지는 성관계하는 장소로 가기 위해 오토바이에 탄 씨돼지를 뜻한다. 낙상매란 둥지에서 떨어져 살아남은 매로 어미는 끈질긴 조상의 얼을 물려받았다 하여 낙상매를 더 사랑한다. 당신은 낙상매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오토바이에 탄 돼지가 되고 싶은가? 이 두 생명이 운명과는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오래 생각했다. 필자는 이 둘의 공통점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끈질기게 비상하려는 날개 달린 이와 쾌락을 기대하며 한껏 흥분한 기분을 느끼는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얘기는 뒤로 미뤄두고 지극히 운명에만 집중해보자. 이만희는 운명을 "예고도 없이 슬며시 왔다가는, 가버리지도 않고 오랫동안 눌러 붙어 있으면서 조이고 틀고 패고 밟고. (중략) 그 거대한 폭력 앞에 우린 결국 무릎 꿇고 마는 것"이라 정의한다. 알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으며 결국은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 이만희는 자신의 운명론을 황재규라는 인물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1 그렇다면 황재규는 어떤 운명을 살아왔을까. 황재규, 43세로 전직 고등학교 영어 선생, 지금은 학원 강사이다. 어려서 화재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살아왔지만,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꿈만 같은 결혼 생활을 보내다가 기형아를 낳고는 그 아이를 죽인 죄로 감옥살이와 상처(喪妻)한 전적이 있다. 지금 당장에 고민은 자신에게 계속 애정을 표하는 제자 경숙을 받아줄 것이냐 말 것이냐다. 그의 생애만 보면 평범하지 않은 삶이기는 하다. 그에게 혐오감이 들기보다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별 볼 것 없다고 그를 비난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필자 또한 그의 생애를 찬찬히 읽었을 때 복덩이 같은 아이를 죽여? 아내를 잃더니 이제 제자와 사랑에 놀아나? 라며 욕을 뱉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황재규의 독백을 끝으로 막이 내리면서 필자는 깨달았다. '이게 황재규의 운명이었구나. 이만희의 정의대로라면 황재규는 이 모든 일을 예측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여야만 했구나.'

 

그렇다면 이제 다시 오토바이에 탄 돼지와 낙상매로 돌아와 보자. 왜 뜬금없이 돼지와 오토바이 이야기가 등장했냐 하면 재규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숙의 구애에 이 이야기로 답한다. 그는 성관계 후 암퇘지의 초라한 모습처럼 되지 말라고, 어서 저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필자가 경숙이었다면 그 얘기를 듣자마자 재규의 집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겉으로는 어이없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사랑을 갈구하는 경숙에 당황하여 내뱉는 동문서답 같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경숙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걸 느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사랑을 꿈꾸는 처녀 경숙의 생각은 다르다. 오토바이의 향로에 따라 씨돼지의 운명은 달라진다는 그녀의 주장, 쾌락을 즐기기 위해 '그 짓'을 하러 갈 때만이 아니고 때로는 도살장에 실려 갈 수도 있고, 가축병원에 가 진료를 받을 수도 있고, 우량돼지 선발 대회에 나갈 수 있다는 그녀의 새로운 관점이 그가 그토록 유지해오던 운명에 관한 신념을 완전히 깨부순다. 몇 년간 묵었던 고뇌를 시원히 뚫은 재규는 경숙과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과거의 불행한 황재규의 운명을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운 황재규의 운명을 다시 시작한다.

 

 

<돼지와 오토바이>는 결국 다소 현실적인 결말과 함께 막이 내린다. 누구든지 겪게 되는 삶에서의 갈등을 통해서 초라하고 내세울 것 없이 부끄러운 삶이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 한번 날아올랐을 때 그것이 그 어떤 삶보다 진정하고 가치 있는 삶이 된다. 과거에 묶여 당장에 처한 현실을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는 묻어두고 새로운 현실에서 날개를 펼칠 것인가. 후자는 고귀한 낙상매가 되는 가장 빠른 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고뇌에서 황재규는 얼마나 시달렸던가? 결국은 경숙과의 결혼으로 낙상매가 가는 길을 택했다. 다시 한번 구겨질 대로 구겨진 그의 운명에서 도망쳐 보려는 날갯짓이 고결하다.

 

돌고 돌아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보려 한다. 운명,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 우리는 이렇게 정의할 수밖에 없다. 운명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딱 한 가지의 정형적인 답밖에 얻을 수 없다. 질문을 바꿔보겠다.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차이에 있어서 우리는 낙상매가 되어 비상할 기회를 잡을 수도 놓칠 수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지금까지의 운명은 어땠는가? 지금까지 꽤 괜찮은 운명이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운명이 야속하다면, 조금만 힘을 내 날갯짓을 시도해보자. 더 이상은 당신을 구제해 줄 새로운 운명에 기대를 걸고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움직임으로 과거의 아픈 운명 속에서 빠져나와 비상하라.

 

"서막은 끝났더라. 미열로 가슴 졸이던 첫 만남의 아슬함은 가을 둔덕 양지바른 터에 평온히 잠들고 나는 탐색기를 마친 권투 선수마냥 활기찬 비상을 꿈꿔야 한다." -본문 내용 중 황재규 독백 일부

 

각주

1. 수업자료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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