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채의 독서 칼럼] 워킹 푸어,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을 읽고

노동 문제와 관련된 책을 찾다가 발견한 책이었다. ‘노동의 배신’이라는 제목이 흥미롭기도 했고, 저자가 직접 체험한 현장의 이야기라 더욱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책의 뒤표지에 ‘소설은 아닌데 소설처럼 흥미롭다’라는 평이 적혀 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마치 그냥 소설책을 읽는 듯이 멈추지 않고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와 가장 밀접한 주제여서인지 가볍기만 한 마음으로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저자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이다. 중산층인 저자가 어쩌다 이런 노동을 체험하게 되었는지는 책의 서두에 나온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일해서 받는 임금만으로 실제 생활이 가능할까?’를 실험해 본다는 의도에서였다. 실제로 저자는 집을 떠나 지역을 옮겨 가며 생활하며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처음에는 식당에서 홀 서빙을 하고, 호텔 청소부로 일하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다음에는 집 안 청소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청소 일을 하고, 요양원에서 치매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 다시 지역을 옮겨 월마트 직원으로 일을 하며 이 실험은 끝을 맺는다.

 

이렇게 나열해 보니 크게 와닿지 않지만, 저자의 체험기는 생각보다 눈물겹다. 가장 큰 문제는 집값은 비싸고, 임금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일자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두 개의 일터를 병행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조차 쉬는 날이 거의 없이 일하고 또 일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다 실제로 먹을 것이 없어 식품 구호소의 도움을 받는다. 또, 저임금 일터에서 일하며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는 도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관리자들이 직원들의 개인 사물함을 마음대로 열어볼 수 있다는 규정을 이야기했다. 집 안 청소 업체에서 일할 때에는 일주일에 단 하루도 쉴 수 없었고, 청소 일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런 류의 일은 거의 육체노동이기 때문에 저자와 다른 동료들은 진통제를 사용하며 아파도 참고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빈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심각성은 더욱 짐작하기 어렵다. 점심을 과자나 핫도그 빵으로 때웠다가 근무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현기증이 나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을,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병가 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1

 

저자가 이 ‘실험’을 진행할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미국 사회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가 마치 오늘날도 똑같다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에서의 일이지만, 그리 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당시 미국 사회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 푸어’ 문제를 꼬집었다. (워킹푸어(Working Poor·근로 빈곤)는 일하는 빈곤층을 뜻하는 말로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워킹 푸어' 문제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노동자들의 현실이 실제로 다가오는 것 같아 더욱 읽을 만한 가치가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던 또 다른 것은 저자 스스로 저임금 일을 하며 위축되어가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유니폼을 입고 일을 하며 땀에 젖은 모습으로 돌아다닐 때 저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계속 생각했다. 또, 은연 중에 다른 사람들이 노동을 하고 있는 저자를 무시할 때에는 그 심정이 느껴져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단순 노동을 하며 노예 취급을 받고, 청소부 일을 할 때 집주인들이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감시하는 모습은 과연 그들이 노동자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딸린 가족이 없는 홀몸에, 건강하고, 차까지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도 먹고살기가 아주 힘겨울 정도로 빠듯하다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다는 걸 알 수 있다.”3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게으르니까 가난하다고, 자신이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절대로 게으른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과 임금을 받고 일하니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일한다 한들 사회적인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일을 해서 번 돈으로는 생활하기조차 너무 빠듯한 현실에 저축은 꿈도 꿀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병이나 갑작스런 해고가 가정 경제에 매우 큰 타격이 되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 사회적 동의에 의해 ‘워킹 푸어’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산다. 그들이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간다. (···) 그들은 ‘주고 또 준다’.”4

 

우리가 편리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에는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 시련이 존재했다. 그들은 자기가 일한 만큼의 합당한 임금을 받아야만 했지만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적절한 임금 수준과 보다 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보장해 주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내 집 마련’이 점점 꿈이 되어가는 상황이라 과연 우리 사회는 계층 상승이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사회를 동여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빈곤 해결의 가장 적절한 열쇠는 무엇일지 의문이다.

 

각주 

1. (인용: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88p)

2. (인용: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01120&cid=43665&categoryId=43665)

3. (인용: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68p)

4. (인용: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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