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드림의 사회학 칼럼] 쓸모없는 문과

문과생(사탐 선택 학생)의 자기 성찰과 자기 혐오

 

 

나는 문과생, 정확히 말하자면 사탐 과목 선택 학생이다. 사회학과를 지망하는, 중학교 시절엔 국어 교사를 꿈꿨던 천상 문과 감성을 가진, 문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문과생', 나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였던 그 단어가 혐오스러워졌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이공계의 전성기가 도래하는 이 시점에서도 문과의 존속을 부르짖던 본인이 왜 문과에 대한 혐오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과적 감성, 추상적 표현, 정신적 표현에 대한 거부감에 빠져들었는지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다.

 

문과생을 이야기 할 때 흔히 '감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화려한 언변, 미사여구, 시적 표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의 선택. 문과적 인간들의 필수 덕목이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 적어도 나 자신 움직임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근 2년간 사회학과 지망생으로서 내가 꿈꾸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에, 정확히 말하자면 사흘 전 샤워를 하며 사색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엔 모든 게 가식이고, 결국엔 모든 게 현혹이고, 결국엔 모든 게 기만이었다는 생각 말이다. 순수한 문과적 감성, 인문학적 감성은 어찌 보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의를 내포하지 않는다. 전혀 의미 없고 쓸데없는 말들의 나열일 뿐이다. 결국엔 이과적, 자연과학적 사실과 결합했을 때 인문학적 발언은 의미로 쓰이게 된다. 만약 이과적 의미들이 없어지면 인문학 그 자체는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역사책이 서술을 생각해 보자. 반만년 역사의 유구성, 우리는 배달의 민족입니다., 고구려 정신, 평화의 DNA, 민주화 정신, 한국인의 근면성 이런 말들은 이제 생각해보니 정말 의미 없고 부질없는, 감동과 자부심을 주기 위해 이용하는 빈 껍데기들일 뿐이다. 한국인의 정신, 그런 것이 있겠는가? 앞에 서술한 모든 단어, 특히 고구려 정신 같은 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일 뿐이다. 필자가 5살 무렵 처음 서점에서 사달라고 말한 책이 광개토대왕의 전기만화였고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책을 보며 고구려를 응원하고 고구려의 문화를 동경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3일 전부터 그런 세월이 정말 부끄러웠다. 신라인이 아닌 고구려인에 의해 작성된 역사 사료는 남아있지도 않은데, 단지 많은 전투를 치른 호전적인 국가였다는 사실 정도만 확실한 상황인데 무슨 고구려 정신인가. 설령 고구려의 사회 문화, 고구려 사람들이 공유했던 정신을 완벽히 알고 있다 해도 천 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사이에 수많은 혼란을 겪은, 특히 세계화의 영향으로 서구의 영향까지 받는 지금, 그런 말이 되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지금이 고구려 시대라고 해도 고구려 정신이 있기나 할까? 왕이 바뀔 때마다 사회의 분위기는 획획 바꿀 것이고 고구려 구성원 개개인들의 생각은 모두 다를뿐더러 그 고구려 백성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을 사상도 왕이 통치를 위해 백성들에게 주입한 사상일 뿐일 것이다. 아마 고구려 시대엔 고구려 정신이 있었다면 백성을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하는 수단 중 하나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요즘의 정치권을 생각해보자. 본인은 우파보단 좌파에 아주 가깝다고 생각하고 여겨지는, 친구들로부터 가끔은 남 페미라고 가벼운 농담을 듣는 사람이긴 하지만 민주화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이 되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런 단어를 말할 시간에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방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구성원 대부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반영하는 것 아닐까? 박정희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말이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표현일 뿐이다. 일단 그런 표현들은 그 뜻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다. 아마 박정희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각각의 사람마다 박정희 정신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이다. 그냥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자고 표현하면 될 걸 박정희 정신이라는 되지도 않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문과 성에 대한 혐오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너무 극단적인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얼마나 이런 표현들 의미 없는지.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인문학 계열의 사람인지 자연과학계열의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발언 중 순수한 인문학적 표현들은 정말 하나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실용적인 것도 없으며 몇몇 우매한 청중에게 아주 잠깐의 감동을 주거나 동기부여가 될 뿐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추상적 표현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물론 자연 과학도 이 사실이 왜곡되어 전달된다면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지만(과거 히틀러가 우생학과 같은 유사 과학적, 비윤리적 자연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설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문학적 발언들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훨씬 많은 독재 정권의 도구, 폭군의 지배 도구, 잘못된 사회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 형성 원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 등 많은 부정적 사건들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알맹이 없음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의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추상적인 표현은 매우 위험하고 혐오스럽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앞으로 모든 인문학을 없애야 한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앞으로의 인문학은 자연 과학에 의존하여 기생적 존재로 연명하거나 자연 과학적 의미를 내포해야 한다. 

 

만약 우리 민족의 위대함, 상대편의 미개함, 잔혹성, 부 정의함을 표현하는 인문학적 표현들이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다면 대분의 전쟁과 분쟁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상적, 관념적 언어의 사용이 줄어든다면 집단/개인 간의 다툼까지 줄어들 것이다. 문과 성의 쓸모없음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 사회 속 평화 실현은 더욱 이른 시점에 실현될 것이다. 인문학이 존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형태는 '윤리학'이다. 자연 과학적 지식을 활용함에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윤리학뿐이다.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윤리의 통제를 받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윤리학과 자체의 전망을 그리 밝지 않지만 나는 인문과학이 아닌 정말로 순수한 인문학들은 모두 윤리학으로 변모해야 존속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도구로서 기능하는 인문학. 그 이외의 순수한 인문학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현혹하는 기만적 학문일 뿐이다. 


나의 결론을 말하고 싶다. 사실 이 칼럼 자체에도 문과적인 여러 미사여구와 추상적 단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통계적 사실을 나타내는, 과학적 사실을 나타내는 효율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말장난할 생각은 하지 말고 분석에 집중하는, 과학적 지식에 집중하는 사회학도가 되는 것이 사회의 평화에 기여하자는 내적 결론을 얻은 나는 점차 이과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갈 것이고 그러길 원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문과생은 반박할 말들이 수많이 떠오를 것이다.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만큼 다른 삶의 의견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활발한 반론이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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