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아의 사회 칼럼] 기후 위기로 '다 죽는다'는 말이 가리고 있는 것

기후 위기가 이슈다. 그냥 ‘평범한 이슈’라고 한다면 푸대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이슈 위에 있는 이슈다. 인류 역사를 한 판의 게임으로 비유한다면 최종 보스라고 할 만한 기후 위기의 등장에 우리는 대충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리 다 죽는단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평소대로 살다가 죽을래’와 ‘우리 다 죽는단다. 뭐라도 하자’가 그것이다. 

 

이 둘은 상이하지만, 공통점 또한 있으니 둘 다 미온적인 태도를 낳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아무리 봐도 임종 직전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상이변들을 아무리 봐도 초강력 펀치라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어컨과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면서 전혀 문제없이 평범한 일상을 잘 보내고 있다. 또 다른 면은 절멸이라는 언어가 지닌 개인성에 있다. ‘우리 다 죽는다’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부각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것에 포함된 ‘나’다. 나의 죽음은 나의 소관이다. 내가 죽는 건 내 맘이다. 따라서 절멸이라는 언어에는 체념의 자유가 반드시 따라붙고, 기후 위기에 대한 행동을 개인 선택의 영역으로 격하시킨다. 결국 ‘다 죽는다’라는 깃발로는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정말로 우리가 다 죽을 것이냐에 있다. 한때 매머드와 친구 맺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고작 기후변화 때문에 다 죽을까? 이는 인류를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장구한 기간 동안 지구라는 ‘배틀그라운드’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종의 후손이며, 이제는 엄청난 기술들까지 손에 쥐고 있는 상태다. 분명 우리는 ‘다 죽지’ 않는다. 

 

 

이 사실을 직시할 때 이른바 '종말론'이 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다 죽지는 않지만, 우리 중 일부는 분명 죽거나 고통을 겪을 것이며,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일 거라는 점이다. 기후 위기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기후 위기는 기존에 존재하던 불평등을 극대화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기후위기는 우리를 모조리 죽이는 핵폭탄이 아니라 일부만을 노리는 정밀타격기다.

 

1995년 7월에 전대미문의 폭염이 시카고를 덮쳤다. 40도가 넘는 기온에 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참사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아래의 조건을 충족했다. 원룸에서 혼자 생활함, 노인임, 가난함, 사회적 관계가 전무함. 이런 사람들에게 폭염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때 시행되고 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복지의 조건으로 노동을 요구했던 터라 노인과 같이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복지 시스템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있던 에너지 지원 정책의 예산은 참사가 일어난 그해에 삭감되었다(물론 그 전부터 지속적인 삭감추세가 있었다). 또 이들이 살던 지역사회는 치안이 나쁘고 사회기반시설과 공공시설이 크게 낙후된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은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1995년에 시카고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완전히 '고립'되어 죽었다.1

 

우리나라의 빈곤층, 특히 노인들도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다. 환기가 잘 안되는 등 거주 공간의 구조 문제와 에어컨, 전기료 부담 문제가 결합하여 이들을 압박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상 공간과 수면 공간에서 훨씬 큰 더위를 느낀다. ‘견디기 어려운 정도’라고 한다. 이런 문제는 겨울에도 그대로 나타나, 이들에게 질병을 안겨준다.2 이들은 더위를 피할 장소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필요로 하지만 아마 주변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또 이들의 노동 공간은 십중팔구 야외이다. 집이 저지대에 있는 경우 폭우가 올 때마다 침수의 위험에도 노출된다(영화 기생충에도 나온다). 이 극단에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생활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나는 이런 문제를 내 주변에서 찾아보기 위해 주변 노후 빌라들을 돌아다니면서 혼자 사시는 어르신을 찾아 다녔다. 처음엔 맴돌기만 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 한분과 대화 하게 되었는데, 그분의 사연은 참 눈물 나는 것이었다. 복잡한 사정을 빼고 말하면, 한 달에 30만 원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할머니였다. 에어컨이나 더위를 피할 장소가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없어’라고 하셨다. 다리가 아파서 열심히 다니시던 교회도 못 나가며 최대 활동 반경이 집 앞까지라는 말을 듣고 ‘더위의 포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선풍기 하나 달랑 있는 단칸방의 모습을 봤을 때는 더욱더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다 죽는다’는 말은 기후 위기를 평등한 위협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는 우리에게 진정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또 그 말이 내재한 추상성은 기후위기가 빠르게 진행되는데도 사람들은 평온하게 사는 이상한 현실을 낳는 데 일조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미지는 언제 도래할지 모를 지옥의 난장판이 아니라, 현재 고통을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다. 여태까지 조명되지 않던 부분을 조명해 거기로 우리의 시선을 모아야 한다. 종말론은 자기 죽음에 쿨한 사람들이 에어컨 틀어놓고 드러누워서 과자 씹으며 문제를 회피하는 행태만 양산할 뿐이다. 내가 그러기 때문에 잘 안다. 

 

즉, 우리는 이제 기후 위기의 불평등성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을 불평등 개선과 강하게 엮어야 한다. 또한 이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시민들의 의무와 책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이는 인권의 영역으로써, 그것은 배려나 온정이 아니라 인류가 발견한 위대한 '원칙'이다. 기후 위기 시대에 그것을 손에서 놔 버린다면 결과는 심각한 사회 혼란과 불안정일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어르신과 대화하고 있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오더니 이거 할머니 드리려 가져왔다고 큰 버섯 몇 개를 주고 가셨다. 사실은 대화 중에 그분 포함해서 두세 명의 아주머니가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가는 걸 봤다. 이런 점에서 내가 만난 할머니는 아주 최악의 상황에 있는 건 아니었다. 이는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관계를 맺고 서로를 위해 주는 것.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 기후 위기에 맞서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일차적 안전망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집단적 행동이 조직될 수도 있다. 이로써 ‘다 죽는다’가 ‘다 산다’로 슬금슬금 바뀌었으면 좋겠다.

 

1.참고: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57051.html

2.참고:http://www.energycent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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