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의 사회 칼럼] 국뽕은 공동체의 흔적이다

 

점점 세계화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분위기를 방송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놀러와 우리 문화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그리고 우리나라 문화를 더 잘 알기 위해 퀴즈를 맞히고 이야기하는 ‘대한외국인’까지. 한국은 요즘 외국인에 열광적이다. 왜 외국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자주 방영될까? 수요가 있으니 방송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외국인이 나오는 방송을 좋아할까? 답을 내리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우리가 ‘국뽕’을 느끼기 때문이다. 국뽕, 흔히 나라 부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애국심이라는 말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말을 잘하는 모습, 외국인이 김치를 좋아해서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애국심이 생긴다. 그러면서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나는 여기서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했다. 공감은 친밀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나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기까지 하는 외국인을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애정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평소 우리나라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던 내국인도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을 욕하면 애국심이 불타오른다. ‘까도 우리가 까지’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내로남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문학가인 루쉰은 자문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타문화, 특히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묘사했던 이들에게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가령, 그는 중국은 한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펄벅이 ‘대지’에서 중국의 진짜 모습을 그려냈을 땐 편견의 이미지를 조장한다며 비판한 바 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나라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들, 결국 애국심이란 것은 처음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국가는 그 공동체의 범위 중 가장 크면서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루쉰의 경우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실제로 펄벅이 중국의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글을 썼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동의하진 않는다. 이런 모습은 굳이 애국심이 아니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남매 사이에 아무리 오빠, 형, 동생이 미워보여도, 남에게 혼나는 걸 보거나 욕을 듣는 것을 목격하면 보호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모두 요즘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우리 삶엔 이렇게라도 공동체적인 모습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국뽕을 느끼고, 우리나라를 감싸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뿌리박혀 있는 공동체의 흔적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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