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말있어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봄날의 햇살같은 존재인가

봄날의 햇살이라는 착각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 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 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최근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는 자신이 어떤 사람 같냐는 최수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녔지만 천재 변호사인 우영우의 대형 로펌 생활을 담은 드라마다. 극 중 우영우의 동료 변호사 최수연과 권민우는 서로 상반된 태도로 우영우를 대한다.

 

'권모술수 권민우'라는 별명을 가진 권민우 변호사는 그의 별명답게 동료 변호사 우영우를 견제하고 갖가지 권모술수를 사용한다. 우영우의 취업은 채용비리라며 사내 게시판에 고발 글을 올리는가하면 사건 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녔다는 이유로 우영우를 무시하고 타인의 도움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반면 우영우와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최수연 변호사는 우영우에 대한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갖지 않고 우영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며, 우영우를 괴롭히는 사회분위기와 사람들을 향해 일침을 날리고 우영우를 두둔한다. 8회에서 그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야! 장애인 차별은 법으로 금지돼 있어. 니 성적으로 아무 데도 못 가는 게 차별이고, 부정이고, 비리야!"

 

'권모술수 권민우'와 '봄날의 햇살 최수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과연 우리는 우영우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봄날의 햇살같은 존재일까? 우리가 '권모술수 권민우'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모술수 권민우'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을 향한 자아비판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은 여러 이유로 고통받고 있다. 이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1차적으로는 국가에게 있지만 2차적으로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있다. 이들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이유는 물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시민들이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약자의 사회적 입지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드라마 속의 약자인 장애인만 보아도 그러하다. 드라마 속 우영우가 사회에서 잘 생활할 수 있는 이유는 우영우를 편견없이 대하는 정명석 변호사가 있고, 우영우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는 최수연과 동그라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약자, 소수자들의 사회적 입지와 삶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드라마 속 우영우는 장애가 있음에도 그를 도와주는 사회 구성원들이 있기에 신체적인 장애는 있을지언정 사회적으로는 장애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도움으로 달라질 수 있는 이들은 비단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인종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면,  성소수자들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특정 국가의 시민들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면 이들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수많은 우영우들이 존재한다. 여전히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이 있고1, 휴식시간 보장을 위해 투쟁하는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있다2. 노동탄압에 저항하는 SPC삼립의 노동자들이 있고3,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있었다4.

 

그러나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권모술수 권민우'와 흡사했다. 소위 '공정빌런' 권민우처럼 청소노동자들의 절규를 소음 취급하며 고소하는 사건5이 있는가 하면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시위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뱉어낸 시민들6도 있었다. 심지어 서울경찰청장은 이런 약자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처벌하겠다고 하는가 하면7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폭력적 공권력 도입을 암시하며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협박했다.8 

 

왜 우리는 드라마속의 우영우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현실속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절규를 외면하는 '공정빌런' 권민우가 되는 걸까? 그것은 아마 잠깐의 불편함이나 조금의 손해도 보기 싫어하는 우리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함께 살아가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삼기에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약자, 소수자들을 향한 무시와 차별이 혐오와 협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더 이상 드라마나 영화 속 오락거리로 취급되서는 안된다. 비록 우리가 조금의 불편함을 겪더라도 이들의 권리는 보장받아야한다. 혹자는 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냐고 하소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시민들의 불편함과 비난을 감수하고라서도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오랫동안 시민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왔다. 그들이 시민들의 불편함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들이 절규했을 때 모두가 그 절규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이 겪는 고통에 결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불편을 감수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약자 및 소수자와 연대해야하는 하는 이유는 비단 책임뿐만이 아니다. 이들의 투쟁은 사실 우리들을 위한 투쟁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는 노인들과 아동들의 이동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파업과 시위는 우리 사회의 모든 직장의 처우를 개선시킬 수 있게 해주는 투쟁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통들은 비극적이게도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 먼저 가해진다. 만약 우리가 힘없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어느 순간 그 고통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왔을 때, 우리가 겪는 그 고통을 물리치기 위해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법에 의해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법을 어기지 않고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해야만 모두가 고통없이 살아갈 수 있다. 영원한 약자, 소수자도 없고 영원한 다수자도 없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문제이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와 차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약자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은 우리가 눈과 귀를 막는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할수록 그 고통의 크기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센가 우리들의 숨통을 조여올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자 사회적 책무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답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사회의 수많은 우영우들에게 우리는 과연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라 떳떳하게 자부할 수 있는가?

 

출처

1.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72111010004991?did=NA

2. 참고 https://www.nocutnews.co.kr/news/5788082

3. 참고 https://www.businessplus.kr/news/articleView.html?idxno=35240

4. 참고 https://www.nocutnews.co.kr/news/5791584

5.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70316170004349?did=NA

6. 참고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712009006&wlog_tag3=naver

7. 참고 https://www.nbntv.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9296

8. 참고 https://www.khan.co.kr/national/labor/article/202207222117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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