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서의 사회 칼럼] 고장난 현관문이 되찾은 이웃의 따뜻함

얼마 전부터 우리 아파트에서는 특별하고 따뜻한 이웃들의 배려가 잦아지고 있다. 1층 현관문의 비밀번호가 잘 눌리지 않아서 몇 번씩이나 다시 눌러야 하는데, 이때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이 다가와 자동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필자 또한 비밀번호가 안 눌려서 조급해지고 있던 때에 조그마한 아이에게 도움을 받아 감동한 적이 있다. 이웃 간의 무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배려받는다는 것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이 단어를 일상생활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고, 어린이 도서에서 가끔 본 것 같다.  이웃사촌은 옆에 사는 이웃이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보다도 가깝다는 의미가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의 모습처럼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먹을거리를 나누고, 일손이 부족하면 도와주었던 옛날에 많이 쓰이던 말이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예도 적다. 개인이 혼자 성공하기도 워낙 힘들다 보니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고, 이웃 간의 관계가 좋아서 크게 이로운 점은 없다는 인식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최근 층간소음 등 이웃 간의 비협조로 인해 서로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층간소음을 참지 못하고 위층에 올라가 칼부림한 사건은 뉴스의 단골 소재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뉴스를 지속해서 접하다 보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많이 있었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예를 들어, 위층과 아래층이 소통하며 합의한 시간대에는 소음이 생겨도 배려해주거나,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여 소음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웃 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계도 더 깊어질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웃 간이 크고 작은?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이유는, 이웃 간 소통의 부재와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아파트 이웃들의 서로에 관한 관심이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경쟁에서 이겨야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퍼지고 있는 현재이지만 결국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려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 남의 불행에 웃고 나만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 혼자 이익을 얻는 것과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 중 선택하려면 대다수 사람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후자를 선택하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아파트의 고장 난 현관문은 우리 사회의 장애물을 상징하고, 서로 도우며 문제를 해결한 아파트의 주민들은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을 상징한다. 구성원들이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면 아무리 큰 사회적 갈등이 생기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만 위하는 것이 아닌 남들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의 주민들처럼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이웃사촌처럼 관심을 가지고 이타적으로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협동하고 배려하며 '나'와 '너'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