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공통적으로 반드시 언급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운수대통’인데요, ‘운수대통’은 운양고등학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자, 하나뿐인 매점입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운수대통에 모여 배를 채우고, 친구들과 웃음꽃을 피웁니다. 특히 우리 학교 매점의 특별한 점은, 책이 구비되어 있고, 자유롭게 과제를 할 수 있는 넓은 테이블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와이파이를 연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방과 후에는 많은 학생들이 협동 과제를 하기도 하고,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학생들이 운수대통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이유는 매점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힘쓰는 조합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협동조합 조합원은 학부모 이사님과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함께 협동조합 행사를 기획한 후,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하며, 차질 없는 매점 운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이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조합원들이 물자 등의 구매/생산/판매/소비 등의 일부 또는 전부를 협동으로 영위하는 조직단체입니다. 협동
지난 7월 9일, 운양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작품이 구름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구름 미술관은 학생들만의 작품 세계가 돋보이는 공간으로, 운양고등학교 4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곳은 학생들이 직접 그린 그림 및 작품이 전시되는 운양고등학교만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구름 미술관의 주제는 '카드뉴스'입니다. 구름 미술관 전시가 1학년 학생들의 미술 수업이었던 본인의 관심 분야에 맞게 주제를 선정해 카드뉴스로 제작하는 활동의 연장선이 된 것입니다. 대략 300여 명의 운양고등학교 1학년 학생 전원이 참여한 활동으로, 더욱 다양하고 의미있는 전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전시 활동에 참여한 학생 중 구름 미술관 기획에 중점적인 역할을 맡은 1학년 5반 윤채빈 학생에게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Q. 구름 미술관 전시에 있어 본인이 한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A. 아트뮤지엄 1학년 부대표로서 전시 기획에 참여했습니다. 디자인팀, 큐레이팅팀, 1학년 대표와 함께 전시 준비 회의와 팜플렛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팜플렛 제작부터 전시품 디스플레이, 그리고 홍보까지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협력하며 진행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Q. 구름 미술관
아직까지도 코로나로 인한 여파가 남아있는 지금 이 시기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 진학 희망 여부나 관심 분야와는 상관없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해보았을 것입니다. 안전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된 상황에서도 매일 학교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3 학생들이 잠시나마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설문조사에는 운양고등학교 3학년 학생 총 31명이 협조해주었으며, 유사한 답변은 생략하였습니다. 1-(1) 문항 "지금껏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인가요?" 1-(2) 문항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 1순위)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32.3%) 답변 2순위) '공부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22.6%) 답변 3순위)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서' (12.9%) 기타 답변1)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아서' 기타 답변2) '추억이 많아서' 기타 답변3) '행복하기 위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게 되어서' 기타 답변4) '웃을 일이 많아서' 2-(1) 문항
지금껏 오프라인으로 동아리를 개설해왔던 운양고등학교가 '온라인을 통한 동아리 개설'을 처음 시도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개학이 연기되면서 오프라인 동아리 개설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동아리 부원 모집 또한 온라인을 통해 실시되었습니다. 온라인 개학과 동아리 모집 방식의 변경 모두 처음 겪는 일이기에 학생들의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역시나 동아리를 주도하며 비교적 큰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동아리 부장들의 우려도 컸습니다. 특히, 교내 활동에 있어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정규 동아리인 만큼 이번 온라인을 통한 동아리 개설 및 모집이 학생들에게 다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온라인을 통한 동아리 개설에 대해 본교 학생들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간단한 인터뷰를 통해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Q. 온라인을 통한 동아리 개설 및 모집에 있어 어떤 점이 가장 불편했나요? A. 동아리 모집 신청을 받을 때 지원자를 한 명씩 직접 볼 수 없었고, 온라인으로 동아리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A.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제대로 된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쉬웠고, 온라인(학교 SNS 페이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와 「규훈」을 비롯한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가 지난해 11월 미국에 거주하는 덕온공주의 윤씨 가족으로부터 매입되어 국내로 들여왔다. 덕온공주는 조선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셋째 딸로 윤의선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윤용구를 양자로 들였다.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는 윤용구의 딸 윤백영이 집안대대로 전하는 왕실유물로 왕실 후손이 3대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한글 책과 편지, 서예작품 등 총 68점이다. 세부적으로 덕온공주 친필유물(6점), 왕실여성유물(22점), 윤용구번역역사서(9점), 윤용구서예작품(11점), 윤백영 한글서예작품(8점), 기타유물이 11점이다.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의 귀환은 국내기관 간 협력을 통해 이뤄졌다.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유물에 대한 정보를 발견·수집하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에 제공하였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소장자와 접촉과 매입 협상을 통해 유물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국외문화재 환수 실적을 보면 2013년 석가삼존도(국립중앙박물관)를
감옥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공간 안에 외지(일본)인이 들어앉아 무고한 이들을 가둬놓고 운용을 한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의 탄압은 불보듯 뻔하다. 유관순이 입소해 감옥 문 앞에서 놀란 데에는 인권의 말살을 또 다시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평도 안 되는 공간에 여러명이 갇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 십 수 명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여름에는 열기로 뜨거워져 숨을 쉬기도 힘들 것이며, 겨울에는 마른 살가죽과 뼈가 얼어붙어 마디를 움직일 때마다 단절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힘겨워 아픈 나날을 지내게 될 것이다. 서로 용기를 북돋고자 하는 행위도 저녁에 잠들 때면 움츠러들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 폭력에 따른 고문과 간섭, 성적 유린까지 이루어졌다고 여긴다면, 숨 쉬기도 힘든 매일이 찾아오는 것에 원망과 한이 서릴 것이다. 흑백으로 처리된 장면들 속에서도 고문의 고통은 아프게 와 닫는다. 선채로 어깨도 펼 수 없는 공간에 갇혀 하루도 버티기 힘든 고문을 며칠이나 감내하고, 말로는
한국인이라면 제일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운 뼈아픈 역사 소재인 일제강점기 시대 영화가 또 한편 개봉했다. 바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다. 관동대지진 후 내부 혼란을 막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일본의 학살. 그렇게 학살된 조선인만 6천 명이다. 십오원 오십전 이라는 일본어 발음이 어색하면어른이고 아이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했던일본의 야만적 행동과 슬픈 역사적 사실이 분노를 끌어오르 게 했던 영화. 일본의 내부적 갈등 해소를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 조선인. 6천명이라는 조선인이 관동대학살의 피해자인 것은 사라지지 않는 슬픈 역사이다. 영화가 가리키는 시간은 일본의 폭주가 본격화되는 1920년대, 이 암흑같은 시기에 일본의 중심에서 자신을 조선의 개새끼라 표현하는 한 사내를 조명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중심으로 다루는 것은 일제의 시각과 반응,사고방식과 논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우리는 당황스럽고 불편해진다. 잊을수도,잊어서도 안 되는 그 시절의 일들, 용서할 수 없는 그 날의 일들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이며 철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박열이라는 인물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우
누비는 옷감의 보강과 보온을 위해 옷감의 겉감과 안감사이에솜, 털, 닥종이 등을 넣거나 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줄지어 규칙적으로 홈질하여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누비는 면화재배 이후 적극적으로 활성화 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다양한 실물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승려들이 일상복으로 입는 납의는헤진 옷을 수십 년 동안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점차 누비기법으로 발전하여 방한과 내구성, 실용성 등이 뛰어나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누비는 누비 간격이나 바느질 땀수에 따라 세누비·잔누비·중누비 등으로 나뉘며, 형태에 따라 오목누비·볼록누비·납작누비로 크게 구분된다. 누비 간격은 잔누비 0.3㎝, 세누비 0.5㎝, 중누비 1.0㎝ 이상으로 구분된다. 세누비·잔누비 중에서도 옷감 2겹만을 누벼주어 겉모양이 오목오목하면 오목누비라 하고, 솜을 여유있게 두고 누벼주어 겉모양이 볼록한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면 볼록누비라 한다. 또 얇은 솜을 두거나 닥종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옷감만으로 누벼주어 평면적이면 납작누비라 구분하였다. 누비용구로는 옷감재질과 동일한 실, 누비 두께에 따른 다양한 바늘 종류, 가위, 인두, 밀대,
해인사 대쟝경판(海印寺 大藏經板)는 국보 제32호로 해인사 경내의 4동(棟)의 장경판고(藏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으로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해인사(海印寺) 장경판전(藏經板殿)은 국보 제52호로 13세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목판 보관용 건축물이다. 처음부터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지어졌고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해인사 장경판전의 건물은 모두 4 개로 ‘ㅁ’ 자 형태를 이룬다. 15 칸(약 27 m)에 이르는 큰 규모의 건물인 수다라장과 법보전이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고, 그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작은 건물인 동ㆍ서사간전이 위치한다.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해인사는불(佛), 법(法), 승(僧) 불교의 삼보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담고 있는 법보사찰이다.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사찰로 꼽히는 곳으로, 고려 때 만들어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다. 신라 때 지어진 절로 의상의 맥을
국보 제46호이며 지금은 유리 상자에 넣어 벽화 유물전 안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모두 6폭인 벽 그림의 내용은 제석천과 범천·사천왕 등의 호법신장들이다.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제석과 범천은 불교의 호법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다. 그리고 사천왕은 이 두 천신에게 직접 통제되는 천왕이다. 벽화에 그려진 제석천과 범천은 붓다의 법을 수호하는 호법신들 중 최고의 신들이며, 사천왕은 이 두 천신에게 속해 있는 천왕으로 이들 모두 원형 두광을 지니고 있다. 이 신장들은 조사당에 모셔져 있는 의상 대사를 외호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의상조사가 붓다와 동격으로 존숭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함께 조상당이 본법당보다 높은 곳에 지어진 것을 보아 화엄종이 보여주는 의상조사에 대한 존숭의 정도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그림의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양쪽의 두 천부
한자로 ‘자금성’이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궁궐, 자금성은 오랫동안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지요. 지금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이라고 부릅니다. 자그마치 5세기 넘게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입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천안문[톈안먼] 성벽은 길고 높아 보입니다. 거대한 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500년 넘게 절대 권력의 중심지였던 거대한 궁궐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궐, 자금성입니다.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天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거대한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14년에 걸쳐 건설한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금성은 이전까지의 어떤 궁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에게 바친 신전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입니다. 기원전 448년부터 기원전 432년까지 당대 최고의 조각가와 건축가의 설계로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도리스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파르테논 신전은 얼핏 보기에는 직선과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의 간격을 균일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시각 효과에 따라 다르게 조절하는 등, 사람의 착시까지 감안하여 곧바르고 균일하게 보이는 과학적인 건축법을 이용했다. 힘과 무게를 지닌 장중함을 자랑하는 파르테논 신전은 2,500년 동안 서구 건축의 모델이자 원형이 되어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신전은 교회, 회교 사원, 무기고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다. 이러한 손상을 보다 못한 유네스코는 첫 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삼아 보호했고, 유네스코를 상징하는 마크로도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신전에 모셔진 아테나가 지혜의 여신이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조영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조선 초기 세종조에 조선의 화가 안견(安堅)이 세종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그린 산수화로서,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의 글씨, 그리고 집현전 문사들의 서예와 시, 문장이 세심히 어우러진 종합 미술품이다. 안견(安堅, ?~?)이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자 안평대군이 그림의 제목과 시와 글을 쓰고 뒤이어 신숙주, 김종서, 박팽년 등 23명의 글이 썼다. 이 그림은 왼쪽의 현실공간과 오른쪽의 도원 세계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견이 1447년(세종 29)에 그린 산수화로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다. 크기는 세로 38.7㎝, 가로 106.5㎝이고,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447년 4월 20일안견의 독실한 후원자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이 꿈 속에 도원(桃源)을 방문하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안평대군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안견이 이 걸작을 단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여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1967년 6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해서탈춤에 속하며 산대도감계통의 극이다. 예부터 해서의 각 지방에는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1년에 한번씩은 탈춤놀이가 벌어졌는데 그중에서도 봉산은 남북을 잇는 유리한 지역적 조건 때문에 나라의 각종 사신을 영접하는 행사가 잦았고 또 지방의 농산물이 모여드는 중심지였기에 더욱 이런 놀이가 성행하였다.약 200여 년 전 봉산에서 이속 노릇을 하던 안초목이 전남에 있는 어느 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많은 개혁을 이루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19세기 말기부터 해서탈춤의 대표적 놀이로 발전하였다. 연희시기는 5월 단옷날 밤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로 원래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 단오 때 외에도 원님의 생일이나 원님이 부임하는 날, 사신의 영접, 탈춤대회가 있을 때도 연희되었다.연희장소는 봉산의 구읍인 경수대였으나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지자 이 놀이판도 사리원 경암산 아래로 옮겨졌다. 당시 놀이에 사용되는 비용은 지방의 유지나 상인들이 부담하였다. 제1과장 사상좌춤 탈춤놀이의 시작 시간을 알리고 구경 온 관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