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코로나 19의 등장으로 인해 대부분의 학교가 휴업에 들어가고, 되도록이면 외출을 자제하라는 권고와 함께 꼼짝 없이 집에만 머물러야 했던 3년 전 쯤이다. 한 해에 고작 한 두번 정도 영화관에 갈정도로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우연히 sns를 하다 '당신의 삶을 바꿀 힐링 영화 모음'이란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영화 '굿 윌 헌팅'을 봤다. 삶이 바뀔 정도로 크게 인상 깊은 영화는 아니였지만 그것을 계기로 무료할 때 영화를 찾게 되었고, 영화에 빠져 고등학교 생활동안 수백편의 영화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단순한 오락 수단일 수도 있고, 위에서 언급한 게시물의 제목처럼 힐링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매세지를 전달하고 동기부여가 되어주고는 한다. '싱 스트리트'와 같은 청춘 영화를 보고,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에 몰입해 새롭게 도전할 용기를 얻게 수도 있고, '노킹 온 더 헤븐스 도어'의 시한부 주인공들을 보고 삶의 소중함을 되새겨 볼 수도 있다. 몇몇 작품은사회적 문제나 삶에 대한 통찰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영화를 감상하면 잠시 현실을 잊고 영화 속 세계에 빠져들 수 있
현대 미술은 난해하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 철학자 아서 단토는 최근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는 예술을 '구현된 의미'라고 정의했다. 작품의 형식, 표현 방식이 무엇이든 예술가가 표현하고자하는 의미를 담고만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술 작품이란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미학에서 예술의 본질이라 일컫던 현실에 대한 모방, 미 등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를 통해 현대 예술은 무한한 자율성과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무엇이 예술인가, 아서 단토, 2015 참고) 하지만이토록 예술의 경계가 흐려진 탓에 ‘이게 예술이야?’라는 무수한 의문들과 함께 대중들에게선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상황에서 우리가 현대 미술에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예술을 감상함으로써 우리는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예술이 추구하는 단일한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소명도, 우리가 고취해야할 예술적 이상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엔 틀에 갇힌 우리의 역할이 있고, 추구해야할 이상 또한 존재한다. 정해진 답을 찾아 살아가는 게 우리의 현재지만 예술에 정해진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작품으로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고,자유로운 사고를 이어나가고,우리만의
소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눈을 잃어가는 남자가 만나는 이야기이다. 실어증에 걸린 여자는 잃어버린 말을 되찾기 위해, 어릴 적 낯선 언어를 계기로 실어증을 회복했던 경험을 이유로 희랍어 수업을 듣는다.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자는 여자의 침묵에 관심을 가지고, 두 사람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더딘 소통을 이어나간다. 시와 같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말한다. 작 중 여자는언어의 폭력성을 강렬히 느낀다. 세계는 언어의 범위를 넘어서고, 따라서 명확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손에 잡히지 않는 찰나의 순간, 느낌들이 무질서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언어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지도 모른다.상대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된다 생각되는 것들이라 해도 언어로부터 왜곡되기 마련이다. 평생 한 가지 언어만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우리로써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번 뱉어진 말은 그 자체로 굳어져 진실이되어버린다.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왜곡과오해로 굳어진다.그러므로 언어에 가두기 어려운 날 것의 감정,느낌, 찰나의 순간들은아름답다. 글로 표현한다 해도 그 이상을 불러오는 것들이 있다.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각성, 부단한 평화를 위한 노력도 전쟁을 뿌리 뽑진 못했다. 먼 나라의 일이지만 우리는 변화하는 경제 지표, 두드러지는 외교 문제 등을 통해 전쟁을 느낄 수 있다. 전쟁은 돈, 안보, 국제 사회의 세력 균형 등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다수가 주목하는 부분도 그와 같다.하지만 전쟁을 조금만 더 가까이서 바라보자. 무고한 개인들에게 자행되는 살상과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전쟁에서 인간은 철저히 소외당하기 마련이다. 국가적인 과업 앞에서 개인은 국가의 부품과도 같다. 이처럼 부품으로 전락한 개인에 주목하는 철학 사조가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발달한 실존주의는 거대한 폭력 앞에 선 개인의 약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찬 생을 꿋꿋이 살아가는 강인한 존재로 개인을 조명한다. 실존주의는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 시대의 흐름으로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실존주의을 담은 예술 작품들은 전쟁 속 개인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트 자코메티는 실존주의를 작품으로 녹여낸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그는 세계대전과 가까운 사람들의
근 십 년간 무선 이어폰이 줄 이어폰을 대체했고, 번거로운 각종 절차들은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대체되었다. 쏟아지는 기술들은 편리함을 신조로 세상을 더욱 빠르고 간편하게 바꿔가고,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한다. 시대가 강박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세상은 누군가에겐 먼 얘기일 뿐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아주 기본적인 생활부터가 불편함의 연속인 사람들이 있다. 장애인들은 문턱에 가로막혀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며, 입구에 가파른 계단이 있는 버스를 탈 수 없다. 모든 음료의 점자 표기가 같기에, 편의점에서 원하는 음료를 고르지조차 못한다.작고 사소한 불편함 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반면, 누군가의 일상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1970년 로널드 메이스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수가 고안한 개념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의미한다. 이는1970년대 미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특수 시설 설치에 따른 비용과 문제점을 줄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고안되었다.1유니버설 디자인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만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 나이, 국적 등 조건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