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정발고는 4월 17일부터 지금까지 ‘위두랑’을 이용해 활발한 온라인 수업 중이다. 처음에는 접속 오류가 생기는 등 서버 문제도 많이 있었지만 개학 전에 미리 몇 번의 연습을 통해 혼란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과제를 정해진 날짜까지만 제출하면 되는 시스템으로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시간이 다른 학생들을 배려하는 수업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원활한 온라인 수업과 더불어 코앞으로 다가온 27일 등교 개학에 학교는 개학 일주일 전부터 학생들에게 건강 자가 진단 설문을 매일 작성하게 한다. 카카오톡이나 문자 등 SNS 수단을 이용하여 학교 성명 생년월일만 입력하면 설문에 쉽게 참여할 수 있다. 발열, 코로나 19의 의심 증상, 주요 감염 경로인 해외여행 유무, 동거 가족의 해외여행 혹은 격리 여부 등 총 다섯 가지의 질문에 답하면 설문은 완료된다. 물론 자가진단인 만큼 철저하게 코로나 19 환자를 격리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설문을 통해 1차적으로 분리가 가능하다. 또한 학생들은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과 동시에 비교적 안전하다는 마음을 느낄 것이다. 설문뿐만 아니라 각 반 선생님들께서는 등교 개학이 가까워진 만큼 등교 개학 때 주의사항이나 필수 물품
“3 . 1 운동 이전까지는 몇 십년간 조선에 있었지만 여성을 보지 못했다.” 이 말은 1900년대 조선에 살던 외국인 남성의 기록이다. 약간 과장된 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 당시 조선에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단적인 예로 여러 독립 운동 단체, 활동들이 있었지만 3 . 1 운동의 유관순을 제외하면 항상 대표적인 인물로 뽑는 것은 남성이다. 모두 김원봉은 알지만 그의 부인이자 부산의 유일한 여성 독립투사였던 박차정 의사는 알지 못한다. 또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는 알지만 임산부의 몸으로 폭탄 의거를 실시한 안경신 열사는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많은 기록이 없기도 없을뿐더러 남성에 비해 아주 소수만이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역할을 맡지 못해서도 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의 많은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남성보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적었던 것일까? 당연히 그들도 참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조선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정서, 타인에 의해서 나설 수 없었던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독립 운동을 하러 해외로 나가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불매 운동이 이번이 처음일까? 아니다.이전에도 1920년 일제 강점기의 물산장려운동이 있었고, 1974년에는 히타치가 재일 교포의 취업을 차별했다는 이유로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이후 일본 제품에 대한 첫 불매운동이 있었다. 이외에도 1992년,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을 지시하고 통제했다는 공식 기록이 발견되어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여성단체들이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일본 불매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대체로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불매 운동에 더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19년 7월, 일본 총리 아베가 대한민국에 대해 반도체, 그리고 디스플레이 제조 소재 수출을 제한하고 일본 수출무역관리령 별표 제 3의 국가군, '백색국가' 지정을 해제시켰다. 2018년 9월에는 총 수출의 24.5%를 차지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반도체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상당한데 반도체의 주요 소재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수출 통제 조치이다.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는 일본이 취한 조치는 명백히 의도적인 행위이다.이에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며 불매 운동에 불을 붙였는데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생활 속에서 폐지를 줍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대부분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남루한 옷차림에 억센 손으로 손수레를 끄는 그분들은 가끔 식당이나 가게에서 나오는 폐지들을 가져가기 위해 점원에게 사정하기도 하고 서로 가져가겠다고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그런데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이는 대기업과 폐지를 줍는 노인들, GDP 등의 수치로만 보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대한민국에서 왜 이런 극과 극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왜 우리나라 노인들은 생계를 위해 길로 내몰리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된 것일까. 길거리로 내몰려 보지 못한 우리들의 손에는 지금 스타벅스 한 잔이 들려있다.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경제관념을 보면 돈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브랜드 커피 한 잔 값으로 기본 5000원 훌쩍 넘는 비용을 지불한다. 학원가에 나서보면 스타벅스, 공차, 게이트 등의 각종 브랜드 커피들이 손에 하나씩 쥐여져 있다. 나도 한때는 게이트 음료를 즐겨 마셨는데 일주일에 세 번 그쪽을 지나칠 때마다 한 잔씩 사다보니 어느새 한 달에 커피 값으로만 4만원이 훌쩍 넘게 되었다. 청소년들이 하루에 한 잔 마시는 커피는 폐지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용해 대표 전투인 한산도, 명량, 노량대첩 등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왔다. 조선수군의 활약 덕에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지킬 수 있었고 그를 이용해 군량미를 조달하려던 일본의 계획도 실패하였다. 거북선은 1413년에 처음 제작되었는데 이후 1513년, 1550년 발명되었던 창선, 윤선 등을 참고로 개량되었다. 오늘날 흔히 알고 있는 거북선이 사실 처음부터 그 형체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거북선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조선 수군들의 함선인 판옥선을 바탕으로 지붕을 씌우고 포문을 설치했다. 판옥선은 2층 구조로 되어있는데 1층은 격군들이 노를 젓고, 갑판 둘레에 화포를 두르고 방어력을 높였다. 거북선은 그러한 형태에 한번 더 지붕을 씌워서 적군들이 함부로 배에 뛰어들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 수군들은 직접 포격을 가하거나 사격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닌, 작지만 날쌘 배를 타고 상대의 함선에 들어와 장악하는 전술을 취했다. 그러나 지붕에 쇠못이 촘촘히 박혀있는 거북선에는 배에 올라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포격 기술도 상당하고 포격가능 거리 또한 멀었기 때문에 애초에 배가 가까이 오게 허용하지 않았다.
과연 이완용은 그저 나라를 배신하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사람일까? 이완용은 1882년 25세 때, 피난 갔던 명성황후를 무사히 복귀시키고 고종이 다시 실권을 잡은 것을 축하하는 ‘증광 별시’에 응시하여 문과 병과 18등(전체 28위)으로 합격했다. 또한 어려서 일찍 '천자문', '동몽선습', '대학' 등의 책을 통달한 그는 상당히 실력 있는 달필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것을 보면 과연 고학력인 사람을 뽑는 것이 옳은 교육시스템일까. 한 나라를 적에게 넘긴 이완용도 그 시대에서는 엄청난 엘리트였다. 제2의 이완용을 오늘날의 교육시스템이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한다. 당연히 자신의 지식을 의미 있는 곳에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가 자신이 누리는 부와 명예를 위해 공부한다. 과거가 아닌 지금에도 입대를 피하기 위한 이중국적,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만 취하는 등 고학력자들이 오히려 그런 질 나쁜 행태를 보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적인 지식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버리고 기꺼이 남을 위해 사는 이들도 많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만 보아도 그렇다. '울지 마! 톤즈'라는 영화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그는,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