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는 저승에서나 쓰이는 말로 만들겠다.-윌리엄 홀시 제독 1차 대전과 2차대전 사이 전간기의일본은 일본 열도내의 자원 부족을 해결하고 대공황으로 만신창이가 된 산업을 다시 전쟁을 통해 부흥시키기위해서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국에 침략했다.그러나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진행해서 일본군을 지속적해서소모하게 했다. 한편서양 열강은 중국에서 아편 무역 보장받거나 중국의 영토를 조차지로 갖고 있는 등 여러 이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중일전쟁으로 이런 이권들이 침해당하지 않을까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팽창을 적극적으로 견제한 것은 미국이였다. 미국은 이미 전간기부터 일본을 태평양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따른 전쟁계획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에서자국의이권이 침해받거나, 자국의식민지였던 필리핀과 괌이침공당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동남아시아에 이권이나 식민지를 가진영국, 네덜란드, 미국, 중국이 함께하는 ABCD포위망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의 일본에 대한 철강, 고무, 석유 금수 조치)을 구성해서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급격하게 약화시켰다. 반미 감정이 치솟은일본 군
나치는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이유를 내부의 적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에 기생충처럼 녹아든 유대인" 들을 모조리 박멸하자고 했다. 그들의 이러한주장은 대공황 당시 다수의 유대인이 고리 대금업에 진출해서 독일인들을 착취한다는 인식과 종교적으로 유대인은 불경한 민족이라는인식이 합쳐져서 권력기반이 불안한 나치에게 대중들의지지를 받아내는 수단으로 유대인 탄압을 이용하였다. 그들의 유대인 탄압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창문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이나 유대인 이라고 페인트로 칠해서 그들의 가게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점주가 유대인임을 알려서 가게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일부 양심있는 독일인이 유대인의 가게를 사용해서 지원하려고 하면, 나치의 지지자들이 양심있는 독일인을 비난하거나 린치하게 만들었다. 또는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라디오를 통해 유대계 자본을 소비하지 말자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2019년 한국은 어떨까? 비록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일본 제품 소비 불매 운동이지만 일부 극단적인 반일주의자들은 대표적인 일본 회사인 유니클로 앞에서 유니클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찍어서 sns에
전략과 전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략이란 거시적으로 계획하고 운영하는 방향이며, 흔히 큰 그림을 의미한다. 전술이란 특정한 목표를 수행키 위한 전략의 하위 개념으로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초점을 둔다. 이렇게 보면전술적으로 이득을 본다면 전략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큰 그림 전략을 짜는 행위, 즉 전략은 매우중요하다. 그 이유를 2차대전의 추축국과 연합국을 한번 비교해 보며 알아보자. 추축국은 전쟁 초기 독일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폴란드단치히의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히틀러와 독일 군부는 이전의 뮌헨 협정을 통해 연합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것처럼 폴란드도 버릴 것이라고 전술적으로생각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또 육군 최강국인 프랑스를 점령해도 연합국인 영국으로 진출할 계획이 없었기에 프랑스 점령 이후부터 부랴부랴 상륙 작전 예행 연습을 했다. 그들은 영국이 프랑스만 항복하면 따라서 항복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쟁 중기 독일은 영국이 항전하는 이유는 소련이 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은 " 발로 차기만 하면 무너질 헛간 " 이라고 안일하게 평가했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으로
1차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필연적으로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 근처에 막강한 요새선을 구축해 두었다. 당시 전략상 독일은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하고 러시아로 군사를 돌릴 필요가 있었는데 시간 제한은 약 6주였다. 6주안에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러시아로 군사를 돌려야지 독일은 패배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전략이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이던 슐리펜이 창설한 계획인술리펜계획이다. 이 계획의 골자는 당시 무방비 상태인 벨기에의 국경지대를 빠르게 통과,프랑스의 북부 저지대를 통과해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였다. 이 계획은 1차대전 당시 실행이 되었으나, 벨기에의 결사항전과 프랑스의 방어로 인해서 파리 북부의 마른 강에서 겨우 막았고최종적으로는 독일이 패배하게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차대전의 평화를 알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20년뒤 1939년 유럽에서는 다시 한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히틀러와 군부는 이번에도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는 강하게 구축된 요새인 마지노 선이 존재했다. 나치는 이번에도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저지대 국가를
제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2차대전 발발 1년 전 뭔헨 협정 직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이전에 본인은 칼럼에서 세계 대공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설명을 조금 해보자면 미국의 거품이 꺼진 경제적 충격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독일도 이 영향에서 피해 갈 수 없었다. 독일은 1차대전 패전국으로써 배상금을 갚고 있어서, 안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세계 대공황까지 닥치자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각해져 갔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틈타서 우익, 좌익 가릴것 없이 극단주의 세력이 고개를 들었고 우익 극단 세력은 히틀러의 독일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 고개를 들고 좌익 극단주의 세력은 독일 공산당이고개를 들었다. 각각 총선에서15% 이상의 지지율을 받으며 예상외의 결과를 보여주자, 당시 독일의 제 1, 2당인 사회민주당과 보수당은 공산당보다는 나치당이 낫다는 생각으로 히틀러를 만만히 보고 히틀러와 연합 내각을 구축해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히틀러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였고,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의 사망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총통 자리에 오르며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 한 가지는 공포 그 자체이다. - 1933년 취임연설에서 프랭클린 댈라노 루스벨트 1929년 광란의 20년대를 상징하는 화려한 거품이 꺼지며, 대공황이 발생하자 미국은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당시 미국 대총령은 후버였다. 사람들은 후버가 자유주의 신봉자로서 경제 위기가 시작되는 것을 방치하다, 결국엔 제때에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 후버 대통령도 나름대로 부흥금융공사를 설립하여 경제 회생에 주력하였다.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연방정부의 공공지출을 늘리는 것이었다. 거대한 후버 댐이 바로 당시 경제 회생을 위한 공공지출의 일환으로 건설된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그는 기초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정부가 생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보다는 모든 재정을 금융기관에 쏟아부어 파산을 막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후버는 경기가 금방 회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금융기관이 회복되는 대신 사람들은 부에 대한 기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1933년 미국경제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의 첫 번째 경기
한국의 6월실업자수는 113만 7천명으로 10만 3천명 증가하며, 1999년 6월(148만 9천명) 이후 동월 기준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체 실업률도 4.0%로 0.3% 오르며 역시 1999년 6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또한 기업가들은 한국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떠나고 있다. 이는 국내 설비 투자동향을 보면 알 수 있는데,이번 2019년 2분기 설비 투자 비율은 -7.8%로써 전분기에 비해 10%이상 증가하긴 하였으나, 여전히 마이너스 수치임을 보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 어떤 시대가 떠오르지 않는가?본인은 70년대 영국병에 걸려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던 영국이 떠오른다. 당시 영국은 외관상은 대영제국이라 불리며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자 UN 상임 이사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제조업의 생산성의 하락으로국제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한국의 상황과 같았다.한국도 외부적으로는선진국이다, G20이다 지역 강국이다 라고 불리며 나름 선진국 취급을 받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상황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내 투자 비율을 감소하고 있고, 실업률은 상향세를 그리고 있어 당시 영국과
최근에 교권 침해와 학교 폭력으로 얼룩져가고 있는 학교들이 뉴스와 신문 등의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아니 심각한 정도가 아니지, 신고를 하지 않은 거지암묵적으로 묵인하거나 쉬쉬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학교까지 생각해 보면현재의 약 3.9%의 비율에서 최소한 10% 즉 학교의 10곳 중에 1곳은 학교 폭력과교권 침해에 얼룩져있다고 필자는 생각 한다. 그러나 여기 필자가 다니고 있는 우리 봉담 고등학교에서 이러한 나쁜 관행,작은 일이기에 일을 키우기 싫어서 개입을 하지 않는 좋지 않은 관행들을없애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선생님이 있기에 미디어 경청 기자인 내가 나서서취재를 해보았는데, 그 취재 대상인 선생님은 바로 봉담 고등학교의 체육 선생님인우성민 선생님이시다. 우성민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으로서는 체육 시간에는 늘 활발하고 열정적인 분위기를조성하면서 즐겁고 항상 노력하는 체육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또 담임선생님으로서의 우성민 선생님은 체육시간과는 다르게 진중하면서도 아이들하나하나에게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 주신다. 아이들의 대인 관계 상담에서는 한 세대를 먼저 산 인생 선배로서의 충고를학업 관련 상담, 한마디로 대입 관련 상담에서는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