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찬의 보건복지 칼럼 2] 녹색통의 간호사는 엄마였다

유한양행과 유일한 그리고, 안티푸라민

부모님의 부모님, 부모님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안티푸라민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종류의 약을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구할 수 있지만, 안티푸라민은 약 하나도 살 수 없던 시절 가난했던 대한민국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었다. 여기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돈의문 마을에 녹색통의 간호사 안티푸라민과 유한양행이 있다.

 

1) 나라의, 나라를 위한, 나라에 의한 기업 유한양행

 

유한양행을 운영하던 유일한 박사는 의약품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일본보다 앞선 제약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아내 호미리 여사의 건의를 통해 첫 자체제작 의약품인 안티푸라민을 만든다. 본격적인 제약생산을 위해 유일한 박사는 경기도 부천시에 대지 이만 평을 매입하고, 제약 실험 연구소와 공장을 세우고 새로운 의약품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1936년, 유한양행이 설립된 지 10년이 지난 후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법인체 회사로 전환하고 직원들에게 액면가의 10% 가격으로 주식을 배분하여 국내 최초 직원 주주제를 실행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유일한 박사는 기업을 통한 사회 환원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결과 1968년 유한양행은 모범 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탄 훈장을 받았다. 1971년 생을 마감한 유일한 박사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주식 14만 941주 당시 시가 2억 5000정도가 사회에 환원되었고, 개인보다는 국가를 외치던 유일한 박사의 신념을 받들어 유한양행은 지금도 나라를 위한 애국 기업 반열에 당당히 올라있다. 

 

 

2) 유한양행과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의 어린시절

만병통치약 안티푸라민을 만든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1895년 1월 15일 평양북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제봉틀로 자수성가하여 크게 성공한 부 유기연과 모 김기복 사이에서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평양은 선교사들로 인해 기독교가 많이 전파된 지역이었고, 이를 통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님 밑에서 유일한 박사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사상을 배우며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9살이 되던 해,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과거 청일전쟁의 고통을 겪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아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랐고, 한 선교사의 소개로 1905년 어린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게 된다. 당시 미국 유학의 인솔자였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에 의해 기독교 집안에 입양을 가게 된 유일한 박사는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미국에서 대한민국을 위한 항일집회의 연설을 도맡아 하는 등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할 줄 아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동양인 청년에서 성공한 청년 사업가까지

유일한 박사는 고등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서 높은 성적을 받았고, 학교에 몇 안 되는 동양인임에도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일한 박사는 1916년 미시건 대학교 상과계열에 입학하였으며, 경제, 경영, 마케팅 학문에 큰 흥미를 갖고 공부를 한다. 유일한 박사는 대학에 다니면서 생긴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을 하게 된다. 같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을 것 같은 중국인을 타겟으로 정하고 중국의 부채, 도자기, 손수건 등을 구입하여 고향을 그리워하는 중국인들에게 팔기 시작했는데, 사업이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큰 돈을 벌었고, 장사가 잘된 덕분에 보다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청년 사업가에서 유한양행의 설립자로

유일한 박사는 1919년 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졸업 당시 발전기회사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현재도 전기 산업의 일 위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제너럴 일렉트릭에 취직한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에 거주 중인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인들에게만 팔았던 숙주나물이 트럭으로 오하이오 번화가의 백화점 쇼윈도를 들이받으면서 미국인들에게도 유명해졌고, 이 사건을 통해 숙주나물 사업은 4년 만에 50만 달러라는 매출을 기록하게 됐다. 숙주나물 사업이 크게 성공하자, 유일한 박사는 성공 자금을 이용해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회사를 운영한다. 그리고, 사업차 북간도를 방문하면서 그의 인생을 크게 뒤바꿔 놓게 될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유한양행이 설립될 192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약품을 수입해서 판매할 정도로 조선의 의료 환경은 열약했다. 조선 사람들은 기생충, 피부병, 감기 같이 단순하고 간단한 약으로도 치료할 수 있는 가벼운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고, 조선 땅에서는 약장수들이 파는 가짜 만병통치약이 판을 치고 있었다. 약 한 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죽어가는 조선 사람들의 열악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그는 1926년 미국에서 잘나가던 사업을 접고 일제 치하에 있던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종로에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1936년, 유한양행이 설립된 지 10년이 지난 후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법인체 회사로 전환하고 직원들에게 액면가의 10%가격으로 주식을 배분하여 국내 최초 직원 주주제를 실행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유일한 박사는 기업을 통한 사회 환원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결과 1968년 유한양행은 모범 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탄 훈장을 받았다. 1969년 유일한 박사는 조권순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1971년 생을 마감한다.

 

 

2) 대한민국 최초의 의약품 수입

 

유일한 박사는 라초이의 지분을 팔아 25만달러 만큼의 의약품을 가지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반 의약품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큰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대한민국 세관에게 의약품을 모조리 빼앗겨버리고 만 것. 그 이유는 바로 약품의 소유주인 유일한이 한국인이 아니고, 약을 취급할 수 있는 약사나 의사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유일한 박사는 3개월 후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아내인 호미리 여사도 한국에서의 의사 면허를 갱신하고 당시 몇 안 되는 약사 중 한 명이던 나천주 약사를 채용해 곧 약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929년, 조선총독부 뒤뜰에서 조선 박람회가 개최되면서 일본 제약회사들이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도립병원들은 모두 일본인의 관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사용하는 의약품도 일본의 것을 사용했는데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의 수입 의약품 영업을 위해 선교사들이 설립한 병원에 직접 찾아갔다. 이 덕분에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평양의 기혈병원, 전주의 예수병원, 선천의 미동병원 등이 유한양행의 약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약이 없어 고통받았던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국내 최초의 의약품 수입사업 덕분에 더 이상 약이 부족해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다.

 

 

3) 유한양행과 안티푸라민

 

안티푸라민이 개발될 때만 해도 한국의 제약사 대부분은 모든 약품을 수입해 판매할 정도로 국내의 의료 환경이 열악했다. 당시 유일한 박사의 아내 호미리 여사는 유한양행 2층에 있는 소아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는 연고라는 개념이 없어서 유일한 박사에게 연고형 소염제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렇게 유한양행의 첫 번째 자체제작 의약품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안티푸라민이다. 원래의 안티푸라민은 관절염, 신경통, 근육통 등 국소부위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으나 삐거나 멍이 들었을 때 혹은 손이 부르트거나 벌레에 물렸을 때 등 온갖 상처 부위에 발리면서 만병통치약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안티푸라민의 주성분은 멘톨, 캄파, 살리실산메칠 등으로 소염 진통작용, 혈관 확장작용, 가려움증 개선작용 등의 효능이 있다. 그리고 다량의 바세린 성분도 함유되어 뛰어난 보습효과도 있다. 이러한 안티푸라민은 염증을 일으킨다는 뜻의 inflame과 반대의 의미를 가진 anti를 합쳐 만들어졌는데, 유일한 박사가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제품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1930년대 신문 광고에는 항상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 등의 문구가 들어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안티푸라민은 1961년 녹색 철제 케이스에 간호사의 모습을 그려 넣으면서 가정상비약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안티푸라민의 매출은 2015년 130억에 이어 지난 2016년에는 150억을 돌파했으며, 올해로 86살이 된 유한양행의 안티푸라민은 이제 어느 집에 가도 구급함에 있을 만큼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민 약이 되었다. 수입 약이 비싸 고통스러워하는 국민들을 돕기 위해 사업을 접고 국민 약 안티푸라민을 만든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이러한 유일한 박사의 깊은 마음은 지금까지도 초록색 통에 담겨 아픈 이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다.

 

 

그 누구보다 국민을 사랑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 유일한 박사는 1971년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회사 유한양행은, 돈의문에서 시작되어 약 30년간 국민들을 위한 약을 만들었으며, 이후 서울의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인해 현재는 건물 일부만 돈의문 박물관 내에 남아있고, 다른 두 채는 철거되었다. 유일한 박사가 우리 곁을 떠난지는 48년이 넘었지만 “기업으로 해서 아무리 큰 부를 축적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있지 아니 한다.”라는 유일한 박사의 말처럼 항상 본인보다는 조국을 위할 줄 알았던 유일한 박사의 신념은 유한양행의 운영 신조에 깊게 뿌리박혀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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