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채린의 영화칼럼 1] '수요기도회' 나약함에서 시작된다

독립영화로 더 다양한 생각 해보기


단편영화 <수요기도회>는 이미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상영한 독립영화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 관객은 이 영화의 제목만 보고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한다. 하지만 ‘기도회’라는 건 영화 제목 뿐만 아니라 영화 내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


영화는 중년 여성들로 가득 찬 집에서 시작한다. 함께 기도문을 외는 그녀들의 모습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을 때,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을 경계하며 도망가는 한 여인과 그녀를 쫓아가는 사람들과의 추격전은 긴장감을 준다. 좁은 골목을 배회하며 겨우 들어간 허름한 아파트에서 중년의 여인은 젊은 아이 엄마를 붙잡는다. 아이 엄마의 등장으로 극이 시작된다.


자신을 구해준 아이 엄마 소연에게 중년 여인 헤라는 일자리를 제안한다. 바로 수요기도회에서의 아르바이트이다.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소연에게 돈이란 필요한 것이고 그녀는 헤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요리 솜씨와 싹싹한 태도로 수요기도회의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소연과 순박하고 수수한 소연의 모습에 미소 짓는 헤라의 모습은 따뜻한 감정을 형성한다.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의 따뜻한 눈빛과 차분한 대사로 흘러간다.

 


그런데 시종일관 수줍게 웃기만 하던 소연이 변화한다. 수요기도회라는 명목으로 모여 도박을 일삼던 중년 여성들 사이에 소연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타로 게임 한 판에 참여했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돈에 소연의 눈에 ‘욕심’이 비춘다. 헤라는 소연을 만류한다. 더는 도박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며 도박을 하는 소연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헤라는 소연에게 보이는 눈빛을 잘 알고 있다. 예전의 자신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헤라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더 큰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희망에 찬 눈빛이 가져올 비극에 대해서 이미 예고하고 있다.


헤라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화장품 방문판매를 빌미로 사람들을 모아 큰 도박장에 그들을 데려가는 일이 그녀의 본업이다. 헤라가 수요기도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헤라에게 돈이 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지켜주고 싶은 소연이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진심으로 말린다. 헤라는 소연이 도박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녀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도박장에 들어가려는 소연에게 “여기 들어가면 다시는 너 안 봐.” 하고 말한다.


소연은 나약한 인물이다. 이른 나이에 결혼했으나 남편은 없고, 부업으로 전전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 그녀에게 유혹했다면 그녀는 당장에 따라갔을 만큼 나약해져 있다. 그렇기에 한순간에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도박’은 그녀에게 행운처럼 다가왔다. 한번 쉽게 얻은 후에는 더 쉽게 더 큰 돈을 쥐고 싶어 하는 욕망은 그녀에게도 적용된다. 아무리 소연이 소박한 인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헤라가 다른 수요기도회에서 새로운 미끼를 찾고 있을 때, 그녀는 소연에게 받았던 손거울을 발견하고 소연을 떠올린다. 정말 그 뒤 소연을 만나지 않았는지 세월이 흐른 뒤, 헤라는 사라진 소연을 수소문해서 찾는다. 고작 손거울만으로 소연을 다시 찾아간 건 그 거울이 헤라에 대한 소연의 진심 어린 마음이고 헤라가 기억하는 소연의 순수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헤라가 겨우 찾아간 곳은 바닷가 근처 허름한 건물이었다. 도박판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헤라는 망가진 소연을 본다. 어디를 보는지 텅 비어버린 눈동자를 마주한 헤라는 비극을 느낀다. 누가 소연을 그렇게 망가뜨렸을까? 헤라는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았을 것이다. 소연을 망가뜨린 사람은 바로 헤라 자신이라고. 내가 좀 더 말렸어야 했는데, 애초에 수요기도회에 발을 들이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소연의 중독으로 인한 타락을 헤라의 탓만 할 수는 없다. 소연 자신의 나약함이 그녀를 비극으로 이끈 가장 큰 이유다. 심적으로 나약하고 물질에 나약한 소연은 돈이라는 물질을 얻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판을 찾아가고 있던 것이다.


헤라는 소연을 설득할 때 그녀의 나약함을 이용한다. 바로 소연을 살아가게 만들고 돈을 벌고 싶게 만드는 존재인 아들이다. 이성을 잃은 소연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일말의 모성애였다. 다시 도박판에 들어가려는 소연은 아들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잠든 아이를 안고 헤라의 차에 탄 소연은 눈물을 보이며 아들을 버려두고 도박에 미쳐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한다. 그녀의 눈물에 헤라는 겨우 안심한다.


주유소에서 헤라는 아들이 있는데 다시 도망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에 자리를 비운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소연은 아들만 놔둔 채로 지나온 그 길로 되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간 길을 멀리서 응시하며 헤라는 오열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마치 소연이 도망갈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얼굴을 한다. 헤라는 이미 소연의 나약함을 모두 보았고 이제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했던 아들조차 소연을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헤라가 소연을 포기할지 아니면 다시 돌아가 소연을 붙잡고 설득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의 독립영화처럼 생략된 이야기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다. 과거 헤라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헤라의 과거는 소연과 어떻게 닮았는지 그리고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흘러 갈지에 대해 오직 관객의 상상과 추측에 맡긴다. 김인선 감독님의 연출 의도는 이러하다.


‘인간은 나약하고, 연민은 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다.’


영화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문장이다. 소연은 나약하고 헤라의 연민은 소연의 나약함을 대신할 정도의 힘이 없다. 헤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소연의 나약함과 결핍은 중독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다.


마지막 문장은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헤라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한 건 소연을 구하러 갔을 당시 했던 말인지, 아니면 소연이 떠난 후에도 그녀를 포기 않겠다고 다시 결의를 다진 것인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독립영화를 볼 때마다 더 깊고 자세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결말을 해석하는 방향도 내 생각에 따라 변화하고 보고 나서의 감상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수요기도회>는 나약함과 중독을 통해 비극을 향해가는 인물의 변화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칼럼소개 독립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은 낯선 독립영화에 한층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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