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채린의 영화칼럼 4] 한 여름에 찾아온 크리스마스

한 여름에 찾아온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


사랑은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랑에 모든 인생을 바칠 것처럼 구는 사람도 있고,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청소년일 테니 사랑에 대해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우정이나 가족, 꿈이 사랑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정해보자. 당신이 죽기까지 반년이 남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당신의 마음을 전할 것인가? 죽음 앞에서 만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이다.

 


90년대 말, 한국 특유의 감성과 감정이 들어간 정통 로맨스들이 연이어 개봉하던 시기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명작이다. 대략 줄거리를 설명해보자면, 시한부 인생을 천천히 정리해나가던 정원 앞에 다림이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삶의 끝에서 사랑하는 정원의 이야기이다. 사진관을 운영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정원은 곧 죽을 사람답지 않게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보통의 시한부 환자들과는 다르다. 살면서 못 이룬 소망에 대해 아쉬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당장 인화할 사진이, 그날 저녁 반찬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원의 앞에 등장한 주차 관리 요원 다림은 정원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그녀를 만난 뒤의 정원은 잔뜩 술을 마시고 어쩌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다림은 정원에게 삶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이유이다.

 


정원이 그동안 살아온 삶은 미련 없이 죽을 수 있을 만큼의 의미였다면, 죽음 앞에 찾아온 사랑, 다림은 자기 죽음과 삶에 대해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주는 존재와 같다. 다림을 바라보는 정원의 눈빛은 그저 사랑만 담긴 눈이 아니다. 다림을 두고 먼저 자신이 죽었을 때를 상상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담겨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정원은 다림 뿐만 아니라 아버지, 첫사랑, 동생처럼 자신의 주변 모든 사람을 되돌아본다.


내가 결국 죽어서 사라졌을 때 슬퍼할 주변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두고 떠나고 싶어지지 않을 것이다. 평상시와 별다를 것 없는 태도로 아버지를 대하던 정원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던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비디오 작동법을 설명하던 정원은 돌연 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낸다. ‘내가 죽으면 누가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알려드리지?’ 결국, 정원은 흰 종이 위에 비디오 작동법을 순서대로 적어나간다. 또 사진관의 사진 인화기 작동법을 메모하기도 하고 자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여동생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위로한다. 당장 죽음을 맞이할 자신보다 남겨질 사람들을 위한 이별의 준비를 한다.

 


영화의 후반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 정원의 모습은 그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착잡한 마음으로 죽음에 한 발짝 들어서는 정원을 볼 때 모든 관객은 숙연해진다. 죽음을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닐지라도 모두가 죽기 싫어하는 마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셔터가 눌릴 때 미소 짓는 정원의 마지막 얼굴이 화면에서 점차 멀어지며 영정 사진으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지켜보던 정원의 삶의 마지막은 비로소 끝이 난다.


영화는 죽음을 고통스럽고 무서운 존재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은 내내 평화롭고 분위기는 우울하지 않으며 심지어 죽음과 가장 맞닿아있는 주인공 정원도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죽음이 끔찍하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로 인식하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름과 가을이 모두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되었을 때, 다림이 사진관 앞을 찾아온다. 사진과의 유리창 안에 걸려있는 자신의 사진을 보며 다림은 정원의 진정한 사랑과 정원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다림이 평생 정원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정원이 다림과의 추억과 사랑을 간직하고 떠난 것처럼 다림도 그를 간직하고 살 것은 확신할 수 있다.

 


로맨스 영화에는 흔히 등장하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는 고백이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림을 바라보는 정원의 눈빛, 정원을 바라보는 다림의 눈빛만이 그들의 진심을 짐작하게 한다. 정원이 다림에게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리고 예쁜 다림이 정원이 죽은 후에도 자신과의 추억에 얽매이지 않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나 살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간직하고 싶은 다림과의 추억에 ‘죽음’ 때문에 눈물짓는 기억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런 나레이션이 등장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정원이 살면서 겪은 사랑이란 언젠가 떠나가고 잊힐 추억일 뿐이었다면 다림과의 사랑은 떠나갈지언정 잊히지 않는 추억 그 이상의 의미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 여름날 찾아와 정원에게 사랑을 선물한 다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 그리고 그사이 아름답게 마지막을 기억할 수 있게 해준 사랑을 보여준 영화였다.



 

칼럼 소개 : 영화에 대한 해석은 관객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 칼럼을 보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바를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매우 뜻깊은 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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