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나 게임을 할 때 상대가 규칙을 잘 모른다면 어떨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나의 공격에 일관된 반응을 보이고 계속해서 방어를 실패한다면 마치 ‘초보자용’ 혹은 ‘혼자 게임하기’와 같은 옵션을 선택해서 AI와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의 강민호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작은아버지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전단을 본인 앞으로 돌려놓다가 작은 문제가 생겼다. “나로선 어쩐지 그게 좀 촌스럽게만 여겨졌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릴 겸 겸사겸사 고향으로 향한다. 복잡한 가족 관계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민호의 모습은 ‘작은아버지 마음 풀어드리기’라는 퀘스트를 수행하러 원정을 떠나는 게임 캐릭터와 다르지 않다. 이것도 다 작은 아버지 때문인가. 나는 일부러 계속 작은아버지 탓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 되지 않았다. _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中 우연히 맞닥뜨린 윤희와 종수의 문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도 퀘스트의 본래 목적을 잊지 않으려 하는 모습, 한
밤은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밤은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이며, 인간의 영역에서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다. 편혜영 소설가의 『밤이 지나간다』는 주로 밤처럼 반복되는 어떤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책의 뒤표지에 실린 조연정 문학평론가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밤이 지나간다.’ 이 문장은 명백히 현재형의 문장이다. ‘지나간다’라는 말 안에 이미 과거를 품음으로써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묘한 현재형의 문장이다.” 단편집 『밤이 지나간다』 속 작중 인물들은 현재형의 삶을 살고 있다. 여느 밤이 그렇듯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없는 현재의 밤을 지나가고 있다. ‘밤’은 ‘고통’의 단순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단순하게 직관적이라는 데서 무섭게 보편적이다. 「해물 1킬로그램」은 섬세한 심리묘사가 특징이다. 유괴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 엠은 남편의 권유로 아이를 잃은 엄마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함께 비슷한 고통을 나누며 자책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는 모임, 하지만 엠은 자신이 느꼈던 고통이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데서 불쾌감을 느낀다. 사람을 잃는다는 문장은 어색하면서도 무섭다. 필자도초등학교 3학년 때쯤 동생을 잃을뻔한 적이 있다. 동생이 올 시간이
“이래도 되는 건가?” 책장을 넘기며 계속 들었던 생각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으로도 유명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작가가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너무 선명해서영혜의 아픔이 활자를 뚫고 나에게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채식주의자”가 첫 번째 목차라서 그냥 단편소설로 끝났으면 조금 찝찝하고 말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그 아픔이 실제로 존재할 것 같아서마음이 불편했다. 오랜만에 오랫동안 불편할 수 있는 소설을 읽은 건, 시를 전공하는필자에게 ‘문학’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계기가 되었다. 비교적 짧은 언어를 다루며 시를 쓰다 보니 언어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슬픔’, ‘아픔’, ‘눈물’ 같은 단어를 어느 상황에나 쉽게 던져버린 게 아닐까, 정작 쓰는 사람도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말이다. 영혜는 어느 날 한 꿈을 꾸고 나서부터 채식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정신에 이상 있는 사람 취급을 받고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한 아빠, 흑염소 한약을 속이고 먹이려 한 엄마 등 가족에게까지 육식을 강요받고 자살시도까지 한다. 형님으로부터는 반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한다. 영혜의 정신을 괴롭히는 이러한
'체스처럼 경계가 뚜렷한 게 또 있을까.'소설을 읽고 계속 맴돈 생각이다. 각자의 자리를 확실한 경계선으로 나눈 체스판, 말을 잡기 위해 옆자리로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바로 옆자리로라도 쉽게 이동할 수 없는 게 체스다. 「체스의 모든 것」은 선배, 국화, 나, 세 인물 사이의 불분명하고 위태로운 관계를 다루고 있다. 선배와 국화의 관계 속에서 철저한 제삼자이자 ‘나’가 화자로서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선배를 짝사랑하는 ‘나’의 시점에서 소설을 읽으니 세 사람의 관계야말로 체스판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체스를 할 줄 모르는 ‘나’가 자리를 비켜주면서 “그런데 그렇게 옆자리로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소외 상태가 된다는 것을 엉덩이를 들어 옮기는 순간 느꼈다.”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물리적으로 옆자리로 가는 건 쉬워 보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정신적인 옆자리가 되어주기까지는 절대 쉽지 않다. 규칙을 확실히 정하지 않은 채로 선배와 국화의 체스는 “결국 의지도 우연도 아닌 충동이 게임을 출발시켰고 그렇게 체스가 시작됐다.”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된다. 체스의 규칙을 두고 의견 차이로 대립한 이후로 선배와 국화는 자주 만난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 먹을 때 가장 행복해요.”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누군가 이렇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받았던 ‘내가 행복한 순간’에 대한 질문, 필자는 그걸 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그리고 위와 같은 답변은 행복의 형상을 내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김치찌개 하나만을 놓고 한 숟갈씩 떠먹을 수 있다는 것, 젓가락에 너무 많이 딸려온 미역 줄기를 덜어내 줄 또 다른 젓가락이 한 상에 함께 있다는 것, 사소한 발견들은 반찬이 그리 많지 않은 밥상에서의 허기를 달래주곤 한다.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권정현의 장편소설 『칼과 혀』는 인간의 본성과 폭력성을 다루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동북아시아를 배경으로 조선, 중국, 일본 각 나라의 세 인물이 만나 그려내는 풍경은 전쟁 이면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에겐 ‘허기’가 존재한다. 그들의 공허함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식욕’으로서 나타난다. 소설에서는 무언가를 먹고자 하는 것도 언제든 폭력적인 형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과 혀』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에서도 포만감을 건드린다. 식욕이든, 소유욕이든 각자의 성에 차야 만족하는 일종의 포
최근에 병원에 가신 적이 있습니까? 필자는 최근에 위가 너무 아파서 내과를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잘못 먹었겠거니,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바로 이 말부터 해주셨습니다.“최근에 신경 쓰이거나 스트레스받는 일 없었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렴” 불규칙한 생활 습관도 한몫했겠지만 의외의 처방을 들으니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할 때 어떻게 했는가.' 주로 스트레스받을 때시험 기간이나 과제가 밀렸을 때 그냥 침대에 누워버리곤 했습니다. 잔다고 해결될 일은 없겠지만 한숨 푹 자면 머리가 좀 맑아지고 적어도 문제 상황을 잠시나마 외면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주문시켜놓고 막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맛있는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아플 때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아픈 마음'에 대해서는 마땅한 치료법도 없고,병명도 없고, 당사자도 모르는 채 방치해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술치료’를 주제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예술치료'를 마음 치료의 한 가지 방법으로 가져오기 전에 우선 필자는
'페르소나'란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인용: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0370&cid=42617&categoryId=42617) 자아와 가면, 가면과 자아, 자신의 행동을 조종하는 것이 자신을속이는 '페르소나'일지, 알면서도 속고 있는 '자아'일지, 어쩌면 그 안과 바깥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사회적 인간, 혹은 사회화가 요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메리 셸리의 괴기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프랑켄슈타인’ 하면 흉측한 괴물을 떠올려,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도 몇 년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다. 자연철학에 빠졌던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생물을 창조할 수 있다
지난 2016년 전국을 오싹하게 한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액션, 스릴러 장르의 <부산행>은 정체불명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긴급재난경보령이 선포된 가운데 방역에 성공했다는 도시, 부산으로 안전하게 떠나길 바라는 생존자들이 'KTX열차'를 주 배경으로 하여 극한의 사투를 다룬 영화이다.(참고: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0966#story) 정체불명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좀비'라고 불리는데, '좀비'라는 소재는 빅터 헬버린 감독의 <화이트좀비(1932)>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강범구 감독의 <괴시(1981)>를 최초로 대중에게 알려지며 꾸준히 흥미 있는 소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영화를 분류하는 데 있어 '좀비 영화'라는 새로운 이름의 장르로까지 불리게 되었고 더 친숙한 소재가 되었다. '좀비'란 무엇인가? 좀비는 사전적으로는 '살아 있는 시체'를 의미하며 (인용:https://ko.dict.naver.com/#/entry/koko/d29922017b504794b87aa46e520cd15f), '환상동물'로 분류되어 구사노 다쿠
알알이 붉게주렁진 열매들과오곡백과가 무르익어 수확하는시기인 가을, 가을이 왔다. 가을에는 단연 단풍구경으로 등산객이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은 북한에서도 단풍으로 이름 난 명산 "구월산"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구월산은 황해남도의 은률군, 악안군, 삼천군, 은천군에 걸쳐있는 높이 954m, 면적은 110k㎡산이다. 구월산은 북한에서 6대 명산 중 하나로 그 명성이 높은데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으로 절리면과 균열면이 깎이면서 생긴 기묘한 모양의 바위와 절벽, 그리고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있다.북한에서 유명한 산이기에 구월산의 이름을 가지고 만든 예술영화 <<구월산에 와보라>>와 노래 <<자랑하자 구월산>>등 여러가지 예술작품이 있다. 구월산(九月山)이라는 이름은 한자 뜻 그대로 9월의 산인데 이는 단풍이 열리는 9월에 이 산의 풍경이 하도 아름답다고 하여 산의 이름이 구월산으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특히 구월산에는 600여 종 이상의 여러 식물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산삼, 당귀, 오미자와 같은 여러종류의 약초들도 많이 나고 있다. 게다가 노루, 꿩, 멧돼지 등과 같은 여러 동물들이 서식하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고 어느덧 사계절 중 3번째 시기인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요즘 같은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가기 위해 산악회나 학교, 각종 단체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등산을 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단풍 명소로 잘 알려진 내장산과 설악산 등의 여러 명소가 있지만 북한에는 어떤 산이 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북한에서 유명한 산을 설명하려 한다. 북한의 강원도에는 남한에서도 많이 알려진 '금강산'이 위치해있다. 아마 금강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남한에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이나 "그리운 금강산"과 같은 금강산에 관한 노래가 몇 개 있다. 그렇다면북한에도 금강산과 관련된 노래가 있을까? 정답은 "금강산과 관련된 노래가 있다"이다.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네~ 금강산 골안에는 보물도 많네~", "금강산에 선녀들이 내린다 하지만~", "금강산이 솟았으니 천하의 절승일세~", "이 산 저 산 명산 중에 강원도 금강산이로구나~"와 같이 금강산과 관련된 노래가 남한보다 훨씬 많다. 그럼, 지금부터 금강산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금강산은 강원도 금강군, 고성군, 통천군, 그리고 회양군에 걸쳐 있으며 동서 길이40km, 남북
올해 유튜브에선 여성 유튜버들의 탈코르셋 동영상이 올라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여성들의 '탈코르셋 인증'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글이 올라오고 있다. 살펴보면 소위 사회에서 ‘여성스럽다’고 정의를 해온 것들, 화장품과 렌즈를 버리고 긴 머리를 자르거나, 원피스나 불편한 옷들을 버리는 등의 사진들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들의 ‘탈코르셋 인증’을 통해서 사회에서 정의해왔던 여성스러움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억압받는 것, 학교와 집에서의 화장을 하지 말라는 것에서 벗어나 탈코르셋일 수 있으나, 현재는 사회적으로 정의해온 여성스러움에 대한 코르셋을 벗는 것을 탈코르셋 운동의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점점 개인의 선택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 즉 내가 원해서 꾸미는 것도 코르셋인가에 대해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코르셋은 억지로 사회의 미에 자신을 맞추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는 것을 일컫는 것인데, 여성 자신이 원해서 꾸미는 것,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은 코르셋을 조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선크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