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으로서 존재할 것인가? 이 질문은 아직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문제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답에 대해 고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하나의 답을 구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는 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왔다. 그 중과거의 대표적인 세 가지의 인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월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영리해서 발명이란 것을 해낼 수 있었던 인간은 기술을 통해 우리 밖에 있는 자연을 굴복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태계에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善으로 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비록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질병과 같은 한계를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모든 것에 정통한 존재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신에게 맹세한 법을 준수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법을 준수하지 않고 추악한 짓을 하게 될 경우 나라가 멸망할 만큼의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을 다른 생명체에 비해 매우 우월하다면서 그것에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기
지난 17일,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끝났다. 주인공 간의 나이 차 때문에 처음부터 말이 많았던 드라마였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나온 기사를 봤을 때 나 역시 그 나이 차 때문에 -띠동갑까지의 차이는 괜찮지 않을까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가 되고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지켜보며 드라마 작가를 향해 있던 나의 반감은 어느새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드라마’라는 생각에 나는 너무나도 쉽게 당연히도 ‘에로스'로 풀어낼 줄 알았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그러했기에. 제작진은 24살 차이의 로맨스가 아니냐는 비판에 이렇게 답했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얘기다’. 그러했다. 사랑이 아닌 ‘연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인 어른들의 틈 사이에서 자라 어둠 밖에는 몰랐던여자가 ‘아홉살 소년의 순수성이 있고, 타성에 물들지 않은 날카로움도 있는’ 어른을 만나 세상의 빛을 보고, 자신이 갇혀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연민, 사랑이라 일컫자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나의 아저씨>를 비판하는 사
2018년은 가히 ‘미투의 해’라고 부를만 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인 미투는 2017년 10월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및 성희롱 행위를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SNS에 #MeToo를 다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직 검사인 서지현 검사가 JTBC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고발하며 시작되었고, 문화계와 정계로 퍼져 나가 시인 고은, 극작가 오태석, 이윤택, 배우 조민기, 배우 조재현, 정계인사 안희정, 정봉주 등이 지목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미투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기이하게 변질되려는 조짐이 보인다.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이 점차 ‘남녀 대결’로 몰리는 것이다. 이 두 운동이 여성의 인권만이 아닌 양성 모두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90년생 김지훈(<82년생 김지영>을 비꼼)’이 등장하고, 여성이 ‘발화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는 미투 운동에서조차 ‘맨스플레인(man+explain, 남자들이 자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여성들은 ‘한남(한국남자)’ ‘남혐(남자혐오)’등의 단어를 쓰며 대한민국의 남자 전체를-‘여자를 얕잡아 보는
여우와 사자의 융합. 군주는 여우인가 사자인가에서 벗어나 둘 다여야 한다는 주장을 던진 것은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던 사회에서의 권력 투쟁과 각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여 <군주론>을 펴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대해 과거 많은 비판이 있어왔지만 요즈음은 그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어떤 이유에서 그의 이론이 현대에서 적극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재평가가 시행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마키아벨리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비판은 제대로 된 군주라면 여우처럼 스스로를 감추고 가면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은 정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의 비윤리적인 주장이 그 비판을 가중시켰다. 그의 주장이 비윤리적인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마치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대신 왕위를 차지한 세조처럼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조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목적과 수단은 별개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prudence를 요구한다.
신선한 요구였다. 시장을 ‘이기심’으로 움직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이타심을 갖고 이기심을 배척하라는 기존 사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요구였을 것이다. 이 신선한 요구는 주장되었을 당시의 시장에 잘 부합하였고 현재에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 도달해서는 이 주장의 기본적 전제인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점차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과연 철저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마이클 샌델은 오늘날의 시장 경제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존재함을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시장 경제를 가지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시장 사회가 되어버린 형태로 변하게 된다면, 그 시장은 우리 사회에서 도덕을 밀어내기 때문이다. 시장이 도덕을 밀어낸다는 것은 곧 도덕이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락함을 뜻한다.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당연히 기대할 수 있어야 할 것들이-예를 들면 규칙의 준수, 배려, 예의 등-사고파는 상품이 된다면, 우리는 타인이 그러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할 때 돈을 지불해야만 한다. 즉 기본적인 윤리를 상대방에게 당연하게 기대할 수 없게 됨을 뜻하고 이는 사회에서 도덕의 부재로 이어진다. 로버트 노직이 최소국가론을 주장하며 정
밤에 나무에 끈이 묶여 도망치지 못했던 낙타는 끈이 풀어진 낮에도 도망가지 않는다. 묶여있었던 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및 다른 문제들을 통해 과거 역사를 부정하고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을 21세기에 부활시키려 한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이 낙타와 같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끈이 풀려있음을 자각하고, 슬픈 과거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독도를 지켜, 한국의 역사적 자긍심과 당당함을 세계에 보여주어야 한다. 묶여있는 낙타가 아닌, 사막을 자유롭게 뛰노는 낙타로서. 독도를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독도의 가치다. 여러 국가의 해군과 공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 군사적 가치가 있고 배타적 경제 수역을 적용시 주변 바다에 묻힌 수많은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 영해·영공에 대한 지리적 가치가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이 가치 때문에 우리가 독도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야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선조들이 그 땅을 지키려고 했던 이유를 퇴색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韓國領’을 새긴 것은 그저 독도가 오래 전부터 엄연한 우리 땅이기 때
2017년 9월, 한 교수가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시인 윤동주의 ‘부끄러움’을 세상에 알리며 천재성을 발휘하고 1984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한국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비판하고 풍자한 사람. 1991년에 출판한 <즐거운 사라>의 외설 논란으로 도주 우려가 없음에도 강의 도중 구속된, 사회가 자신의 문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세상을 떠난 교수. 故 마광수 교수이다. 마광수 교수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1989년 출판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세상에 충격을 준 고인에 대해 '교수품위 시비' 논란이 일었고, 국문과 교수회의는 마광수 교수의 2학기 전공과목 폐강조치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을 지지 또는 반박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앞에 나란히 붙었다. 3년 후 마 교수는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고, '음란물제작 유포' 혐의로 대학 강의실에서 강의하던 중 긴급 체포된다. 마광수 교수는 <즐거운 사라>등의 작품이 외설스럽다 하여 법정에까지 갔던 논란의 주인공이었다. 엄숙주의와 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비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눈앞에 놓인 사물을 인식해왔다. 경험으로 사물을 인식하느냐, 아니면 이성으로 사물을 인식하느냐 이 두 가지 갈래는 수 세기를 싸워왔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미궁이겠지만, 분명 인식론에 대해 아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인식주체가 있다. 이 주체는 태어날 때부터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innate capacity)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주체가 대상을 경험(인식)하는데, 이 대상 역시 특성이 있다. 바로 ‘선재성’이다. 선재성에 대하여 사전은 ‘시간적·심리적으로 앞서는 성질로 예를 들면 경험론에서 감각은 지성에 시간적·발생적으로 앞서 존재한다는 것 따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선재성을 통하여 대상은 주체로부터의 독립성을 전제로 가지게 된다. 인식 주체가 대상을 경험하면서 대상과 주체 간의 ‘관념’이 생겨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우리가 만들어낸 관념과 대상이 항상 같은가? 만약 관념과 대상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면 이것은 진리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대상과 관념이 일치할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상식적 실재론자들이다. 외부 세계는 우
2016년 7월,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정책기획관과 경향신문 기자들이 만났다. 구의역에서 19세의 청년이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한 사건이 언급되었고, 기자들은 컵라면도 먹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불쌍하다며 자기 자식처럼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이에 정책기획관 曰,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것은 위선이다. 출발 선상이 다른데 그게 어떻게 같아지나?”라며 “민중은 개·돼지다.” 작년 이맘때에 큰 논란이 되었던 나향욱 전(前)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한 말이다. 구의역 청년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는 그가 내세운 것은 ‘이성’이었다. 감정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완벽한 이성을 가지고 그 사건을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반면 기자들은 자기 자식처럼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둘의 의견 중 우리가 더 동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 기자의 의견일 것이다. 감정,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에게 감정은 이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졌었다. 감정을 버리고 이성을 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표 주자가 바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고 한 데카르트(Rene De
최근 M-net에서 방영된 ‘프로듀스 101 시즌2’라는 프로그램이 ‘워너원’이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키고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무려 101명의 남자 연습생들이 나와서 서로 경쟁하며 ‘국민 프로듀서’들에게 표를 받아 등수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101명 중 데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11명뿐이었다.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에 열광했다. 많은 연습생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알릴 기회였으며, 데뷔 혹은 재데뷔를 할 수 있는 등용문 이었다. 아이돌의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지는 좋게 평가되었지만, 11명을 뽑는 가혹한 방식은 매우 안타까웠다.프로듀스 101 시즌1이 처음 나왔을 때 대중의 많은 비판은 ‘어떻게 사람에게 등급을 매길 수 있느냐’였다.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A부터 F까지의 등급을 매기고, 순위를 매겨 탈락시키는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은 인간에 대한 윤리의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샀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이 이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프로그램에 열광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에게 순위나 등급을 매기는 방식들에, 경쟁의 방식에 익숙해진 것이다. ‘프로듀스 101’, ‘도전 골든벨’, 각종 음악 방송 등 우리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송들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대두되고 있는 두 가지 이념은 공동체주의와 민족주의이다. 이 둘 중 바람직한 방향으로서 일컬어지는 것은 공동체주의이다.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현대 철학자 중 모두가 알법한 학자로는 마이클 샌델이 있다.한 가지 신기한 점은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사상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공동체주의가 현대 사회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철학자들의 사상이 씨앗이 되어 오늘날 싹을 틔우고 있다. 그리고 이 사상이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계속해서 주고 있다는 것은 무시하지 못하는 부분이다.논어에서 '의'는 올바름과 공정하다의 의미로써만 사용되었다. 공자는 의(義)롭지 못하면서 부귀(富貴)함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다. (7-15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의를 이야기할 때 올바르지 못했음 혹은 보편적 도덕 규범에 어긋남 등의 의미로써 의를 사용한 것이다. 올바른 약속을 했을 때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한 것도 (1-13 有子 曰 信近於義면 言可復也…(후략)) 마찬가지 의미로써 쓰인 것이다.이렇게 그가 의를 활용한 뜻을 보건대
자본주의사회에 태어나 어느정도 '사회'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을 즈음, 어린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답한다.'공무원'.그 이유는 안정적으로소득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꿈이 '공무원'인 세상. 이 것이 자본주의를 떠받드는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다. 과연 어린 아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게끔 하는 이 사회 구조가 옳은 것일까. 자본주의의 이상과 괴리된 현실물론 처음 자본주의가 구상한 노동시스템은 지극히 이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 완성과 실현을 위해 자율적으로 노동해 온전히 자신의 것인 노동의 결과를 얻는 것, 이것이 태초 자본주의가 꿈꾸던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앨빈 토플러, 마셜 맥루한과 같은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실현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 이상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어딘가에 취직하고 돈을 벌기 때문에 자신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노동할 것을 사회로부터 암묵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하는 것을 따라 하며 그저 돈을 위해 취직하고 돈을 위해 남이 시킨 일을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많은 아픔을 갖고 살아간다. 자본주의에 물든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때로는 상사에게, 때로는 동료에게, 때로는 친구에게, 때로는 가족에게까지 치이면서 살고 있다. 많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괜찮은 척’을 한다.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모든 괴로운 상태를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말 모든 아픔이 나쁜 것일까? 모든 아픔은 감추어야 하고 사라져야 할까?사실 아픔은 우리에게 발판이 되어준다. 그 발판을 밟고서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하여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수많은 발판을 밟은 사람은 높은 곳과 먼 곳은 물론, 낮은 곳과 가까운 곳까지 모두 바라보는 성숙한 태도를 갖추게 된다. 이런 아픔은 시민 의식 속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여 다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위안부의 아픔을 뼈에 새겨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낼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의 아픔을 기억하여 비리와 독재로 얼룩진 권력자를 몰아낼 것이다. 마이클 샌델과 같은
시어 중 이보다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인 단어가 있을까. ‘밤’이라는 단어는 희망을 상징하는 해를 몰아내는 뜻으로, 이겨내야 할 고난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밤, 시련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이다. 무릇 땅은 비가 온 뒤 햇볕에 말라 더 단단해진다고 하였다. 우리가 두려워하던 밤은 과연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었는가? 밤이 있어 우리는 낮을 기대하게 되었고, 고난이 있어 해방을 염원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략에 당하였기 때문에 자주적인 독립을 바랐고, 외세의 이간질에 의한 민족끼리의 다툼 때문에 통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독재의 탄압이 있었기에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섰다. 박근혜 게이트와 촛불집회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은 이번 ‘박근혜 게이트 사건’으로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며 오히려 과격한 방안이 아니냐며 의문을 품는 태도를 보이면서 사건의 보도와 함께 조롱하는 낯빛을 보였다. 또한, 외신들은 이번 게이트가 미국의 ‘워터 게이트 사건’보다 심각한 일이라고 보도하며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교·외교·내정을 간섭했던 라스푸틴에 최순실(최서원)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국정농단에도
십중팔구,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해 공부 하는가를 물으면 답은 ‘성공을 위해서' 라고 말할 것이다. 성공, 성공이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성공할 것을 요구하고,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것에 너무 지쳐버렸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공을 위해 수많은 커리어를 쌓아왔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우리는 쉽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나를 성공하도록 만들어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커리어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원인에 대해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세 가지의 답을 제시한다. 주변에 속물(Snob)이 많다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속물은, 어떠한 사람의 일부분으로 그 사람의 전체적인 면모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단편적인 예시를 들자면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을 통해 상대의 직업을 알게 된 사람은 상대에게 얼마의 시간을 더 투자할지를 결정한다. 이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타인에게 투자하는 시간의 양이 그 사람에게 얼마의 애정과 존중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지상주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