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의 사회 칼럼] 우리는 타인에 얼마나 무관심한가

 

올해 영어 수능특강에 이야기 속 일화의 중요성을 다룬 지문이 있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다른 건 다 잊어도 글 속의 일화는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정작 관심 가져야 할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 관심은 이미 존재하기에 그것의 부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관심의 방향이 재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일상을 궁금해한다. 특히 그것이 연예인의 일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면, 일반인들의 브이로그 영상에 대해선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와 다른 사람에게 끌린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타자화’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갈 뿐인 ‘사람1’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한 모습의 사람들에게 매료되는 것이다. 일반인도 우리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특별함’이 있다면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함’은 대체로 빛나는 것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일상을 살펴볼 만큼 여유는 있으면서, 정말 관심이 필요한 일은 눈여겨보지 않는다. 개인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끔 간과한다. 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정보를 접해도 쉽게 흘려넘긴다. 그렇게 점점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이제는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내가 세상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지경이다.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지 이제 알겠는가? 우리는 철저히 개인을 생각한다. 그런 개인뿐이라면 인간을 왜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겠는가. 

 

‘타자화’는 거리를 두는 방식이다. 나와 그들을 다르게 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 정도면 되었다. 우리가 상대를 타자화할 수밖에 없다면 그러더라도 이면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이상화한다면, 우리가 정말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 주변의 일이다. 이상적인 모습은 우리가 만들어 낸 프레임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만 보다가는 주변의 일을 잊게 될 것이다. 나의 고통은 잘 알면서 왜 타인이 나와 같은 고통을 겪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우리는 내가 겪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하지만 관심의 깊이는 상대적일지라도 그 자체로 동등하게 여겨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일상은 빛나는 날들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겐 고된 날들일 수도 있다. 다. 같은 하루를 살지만 다 같은 일상은 아니다. 결코 동일할 수 없다. 관망도 좋다. 다만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이상만 좇지 말고 현실을 봐라. 차를 타며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아름다운 강이 아니라 창문을 내리고 제 눈으로 보는 뜨거운 눈물을 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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