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감옥에 가게 되고 벌금을 납부해야 한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법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 법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다. 선한 사마리아인법이라고도 불린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무엇일까?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조해 주는 것이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을 발생시키지 않았음에도 구조해 주지 않았을경우에 윤리적으로뿐만이 아닌 법적으로도 처벌하는 법이다.1나는 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대한민국에는 도입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착한 사마리아인 법기준이 확실하지 않다. 사마리아인 법이 도입되었을 때 처벌의 기준은 무엇일까? 10m 내에 있는 사람? 아니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본 사람? 이를 어떻게 확인하고 판단 후 판결을 내릴 것인가? 10m라면 만약 그 사람에게 장애가 있었다거나 도와줄 만한 상황이 안 됐더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봤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사마리안 법은 기준이 모호하고 사람마다 판사마다 주관적일 것이다. 두 번째, 도덕성을 법으로 강제적 해선 안 된다.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강제적으로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덕을 법으로 하자는 것을 다른 예에 들어
법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함이 아닌 처벌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법안이 통과 되어서 지금의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60여 년 전 관점으로 만들어진 법이 현재 사회에 동일한 관점으로 적용되고 있다면 어떨까? 갓 쓰고 자전거를 타는 꼴이다.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는 법, 소년법이다. 소년법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규정이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성인범죄보다 잔인한 범죄를 청소년이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처벌을 받지 않거나, 잠깐 소년원에 들어가는 것이 끝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며 소년법을 꼭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법은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법,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하지 않을까? 소년법을 개정하기 위해선 소년법의 이해가 필요하다. 소년법의 정의는 소년법 제 1조에 따르면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에 대한 보호처분 등을 규정하고 있는 법률이라 기재되어 있다.1 소년법은 만 10세에서 19세 사이의 소년에 적용된다. 만 10세 미만은 범법소년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과 보호처분이 불가하다. 만 10세~14세 미만인 촉법소년은 불가하나 보호처분이 가능하다. 만 15세~19세 미만
한때 논란이 되었던 안락사. 안락사란 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해 인위적, 의료적인 행위를 통해 강제적으로 끝맺음을 하게 되는 말한다.1 비슷한 것에는 존엄사가 있다. 존엄사는 사망을 하는 사람의 존엄서의 보존 목적으로 스스로의 결정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안락사는 인간의 목숨을 가져가는 무서운 도구이다. 그럼 이런 안락사를 없애는 것만이 맞는 걸일까? 현재 한국에서는 존엄사만 허용되었고 안락사는 불법이다. 나는 그 이유로 악용에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악용한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때문에 나는 안락사에 동의하는 바이다. 첫 번째,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한 생병 유지는 막대한 비용 부담을 준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는 치료, 입원, 장치비용의 막대한 금액이 소요된다. 이러한 금액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부담하기 어려운 높은 금액이다. 만약 안락사가 없다면 환자의 가족들은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기 때문에 형편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장기를 이식하여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은 장기가 없어 돼지의 장기를 이식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돼지 장기를 이식한 환자는 1년도 못
사회는 부모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있다. 말썽부리는 아이, 말 잘 안 듣는 아이는 ‘부모가 잘 못 가르친 것’ 또는 ‘매를 많이 들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라며 부모의 교육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하여 부모는 아이를 엄격히 가르쳐야 하고 매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야말로 훈육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를 엄하게 매로 가르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나는 부모는 아이를 훈육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이를 인정해주고 함께 해주는 존재이다. 나는 자녀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체벌은 자녀 교육에 도움 되지 않는다. 부모들은 아이를 교육해야 한다. 이것을 훈육이라 부른다. 훈육이란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1바른 품성으로 바로잡는 것을 때리고 정신적 문제를 입히는 것이 과연 바른길로 인도하는 훈육일까? 폭력적인 것으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 오히려 부모를 따라 할 가능성이 크다. 또 부모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화풀이로 자녀를 때리는 경우도 있다. 체벌은 도덕, 바른 품성과 거리가 멀다. 둘째, 체벌이 아이에게 평생에 상처를 입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의 매’ 부모는 아이를 위해
투표를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는 벌금형에 처하는 법, 바르다고 생각하는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선거할 때 투표를 하지 않은 시민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방안 의무투표제. 의무투표제 꼭 필요하다고 보는가? 의무투표제란 말 그대로 유권자가 의무적으로 투표하도록 하는 제도이다.1이를 어겨 투표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리는 법적 책임을 지닌다. 즉, 투표를 반드시 하지 않을 시 본인에게 불이익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의무투표제를 도입해야 할까? 첫째, 참정권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우리에겐 ‘투표해야 할 권리가 있다’ 라면 ‘투표를 안 할 권리’도 있어야 한다. 투표는 의무가 아닌 권리이다. 국민은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안 된다. 오히려 벌금, 이용 제한 같은 불이익을 주게 된다면 역효과로 후보들의 공약을 제대로 읽지 않는 등 나라에 해가 될 수 있다. 국민들은 투표를 통하여 현재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나타낼 수 있다. 투표를 통해 기권하거나 투표에 불참하여 정치 상황에 대해 불만 사항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의무투표제가 생긴다면 국민들의 자유를 훼손하고 선택을 침해하는 것과 같다.2 둘째, 의
‘머리카락으로 사람을 들 수 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푼젤이라는 동화에서는 머리카락으로 사람을 들어 높은 탑까지 들어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단지 동화라서 그런 것일까? 또 과연 사람의 머리는 라푼젤의 머리만큼 길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라푼젤은 마녀를 끌어올리기 위해 20엘 아래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다, 이로써 라푼젤의 머리 길이는 적어도 약 23m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1하지만 과연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머리카락이 23m 이상으로 자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이다. 왜냐하면, 머리카락은 계속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발모와 탈모를 번갈아가며 반복하게 된다. 순환 주기는 2~6년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머리카락의 수명이다. 1년에 머리카락이 13~18cm가 길 수 있다.2 머리카락이 13cm씩 6년을 산다고 해도 23m는 불가능이다. 때문에 라푼젤의 머리 길이는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머리카락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었다. 털은 계속 자라는데 '머리카락 길이에는 한계가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다. 모발은 탈모와 발모를 번갈아 간다고
인종차별, 남녀차별, 학력차별은 모두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차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말투, 생김새 등이 서로 다르다. 겉에 드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가치, 생각, 문화, 종교 등의 의견까지도 모두 다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서로 구별하는 것을 차이라고 한다. 서로 같지 않고 다른 것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를 말한다.1 그렇다면 차별은 무엇일까? 차별이란 것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자신과 조금 다르다고 차별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차이와 차별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그럼 차이와 차별은 같은 것일까? 차이가 있다고 차별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과거 미국에 흑인 전용 백인 전용이 존재했었다. 흑인과 백인은 단순히 피부의 색 차이인데 말이다. 피부 때문에 ‘흑인은 백인 운전자를 추월해선 안 된다’던가 공공시설인 버스에서도 ‘흑인은 백인보다 뒤에 앉아야 한다’등 이상한 법이 존재했다. 피부색 때문에 노예가 되고 귀족이 되곤 했다. 과연 이게 맞는 것일까? 피부가 어두우면 노예 피부가 밝으면 귀족. 이것은 엄연히, 틀린 것이다. 둘의 피부색 차이 때
현재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비상사태에 직면 중이다. 사람들은 지구의 기온을 산업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이전 수준보다 섭씨 1도 만큼 한계점은 것으로 집작 하며 만약 그것이 1.5도라는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지점을 넘었을 경우 한 방향으로 치우쳐서 흘러가는 것을 잡을 수 없는 피드백 루프가 형성이 되고 그에 따른 심각한 기후 이변들로 지구의 생태계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의 수준으로 망가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하지만 정부는 이런 기후변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저탄소를 목적으로 한 한국판 그린 뉴딜이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린 뉴딜은 그린(green) 그리고 뉴딜(New Deal)의 합성어로 고 탄소 경제를 탈 탄소와 저탄소 사회를 지향한 ‘그린’과 정부의 재정투자로 구조를 바꾸는 것을 추구하는 ‘뉴딜’로 이루어져 있다.2 나는 그린 뉴딜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글로벌 그린 뉴딜’이라는 비문학 책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정보를 찾아보면서 문득 ‘그린 뉴딜 지금 당장 필요한 정책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린 뉴딜이 지금 당장 왜 필요한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첫째, 하루라도 더 빨리 고 탄소에서 저탄소로 바꿔야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우리들은 온라인 수업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 확실히 오프라인보다 제대로 교육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18세기 때 어린이들은 지금과 비교도 못 할 만큼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무시당했었다.1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교육을 받기보다는 그저 어른들의 축소판으로서 사회에 적응해 살 수 있도록 훈련하는 거였다. 그러나 그런 교육을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참된 교육을 시킨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 몬테소리는 몬테소리 교육으로 아이들의 내면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몬테소리의 교육은 무엇일까? 몬테소리 교육은 보호자 주도 주입식 교육이 아닌 환경은 마련해 주지만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는 아이 중심의 교육이다. 현재 우리들이 받는 교육이다. 기본 원리는 자유성, 정리된 환경, 감각 교육이다. 먼저 자유성의 원리는 어린이의 지적 호기심이 자발적으로 나타나기에 적합한 환경이 갖추어지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몬테소리는 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놀며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교육 현장은 교실, 응접실, 식당, 목욕탕, 정원 등을 갖춘 공간이어야 하고, 모든 비품은 어린이가 다루기
최근 학교 폭력, 집단 폭행, 왕따, 그리고 피해 청소년들의 고통이나 자살에 관한 뉴스를 자주 듣고 보게 된다. 여러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그중 해결이 안 된 상태로 끝나거나 극단적인 결말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한 명이라도 나서서 이야기한다면 학교폭력도 점차 줄어들 것이고, 그로 인해 자살 같은 극단적인 일은 줄어들 것이다.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책 <방관자>는 학교폭력을 방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방관자 내의 방관자의 의미는 피해자를 도와주지 않는 학교폭력 방관자를 일컫는다. 나는 오늘 이런 학교폭력 방관자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첫째, 방관자는 다른 사람에 피해를 관심 두지않는다. 책에서 할렌백(피해자)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모두 방관만 한다.1실제로 우리는 ‘누군가가 하겠지’라던가 ‘내가 한다고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피해를 점점 무관심해져 간다. 둘째, 방관자는 방관자를 양성한다. 방관을 한 명이 하고 있다면 ‘침묵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방관을 하게 된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한 명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