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로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이 불상이 특히 주목 받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자세와 섬세함 때문이다.동상의 표면은 5mm 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과 발가락 관절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이 되었는데,이를 통해우리나라의손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고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많은유명 석상과 조각상들이 존재해,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손기술이나 제조부문에 있어서 발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삼국시대부터 제조 기술이 발달했었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라웠다.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반가사유상에 표현 되어 있는 생생한 옷주름과 아름답고 완화한 표정, 우아한 곡선은한국의 미적 요소를 제데로 보여주는 면이라고 생각한다.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의 표정에서어떻게 보면 슬프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은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연상케 하는데, 모나리자가 유럽 최고의 미소라며 우리나라의 금동미륵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원한 '꿈의 학교' 활동으로 조선 5대 궁궐을 답사하며, '전통건축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활동을 했다.경복궁에 있는 현판들이 눈에 띄였는데, 아름다운 건축물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을보며 거대한 야외 미술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점은궁이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작가들이 쓴 서예작품이 현판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유가궁금해조사 해본 결과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많은 전각들이 훼손 되었고 이를 복원하는 작업에서 현대 작가들의 글씨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우리의 문화유산이 훼손된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지만,과거의 예술작품과 현대의 예술작품이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어 있지만 다른 곳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현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조사하고 싶어 인터넷으로 알아보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현판들에 대해 조사하며새롭게 알게된 사실로, 단순히 전각의 이름만을 표시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아니라는 것이다. 예시로 숭례문의 경우가로로 작성된다른 현판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세로로 글이 써져 있다. 이유는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북악산에 있는 불의 기운을
백제 시대에는칠지도나 호류사 탑 등 많은 아름다운 유물들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금동대향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백제의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있는 금동대향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금동대향로는 백제 시대의 유물로 국보 제 287호로 지정 되어 있다. 특징으로 향로에는불교와 도교적 세계관의 모습이 같이 표현되어 있다. 향로의 바닥에는 도교적 세계관에서 음을 상징하는 현무와 위에는 양을 상징하는 주작의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주작의 아래는 무릉과 같은 세계를 표현하고 그 아래를 연꽃이 바치고 있어 불교적 모습도 같이 나타난다. 당시 백제에서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의 영향도 꽤나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수 있었다.유물 하나만으로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엿볼수있는 유물이라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 깊은 깊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이렇게 많은 요소들을 표현하고 있어 어지럽진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금동대향로는 도교와 불교소재들이 잘 어우러져 있고,많은돌출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400년이라는 시간동안 성하지 않고섬세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14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평균6mm의얇은 표면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이다. 서원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존재하며, 중국에 수가 더 많이 존재하며, 서원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기관이다. 그런데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에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동시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이런 것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날 명절에 제사를 지내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에서 유교의 모습이 남아 있는 등 유교는 아직까지도우리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원은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도 다른점이 있는데 위의 기관들은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다면 서원은 그곳에 배향된 선현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다.학문뿐만 아니라 가치관, 사상, 정신 등을가르치는 모습에서의 특이점이훗날 서당과 오늘날의 학교의 기본적인 기틀을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등재기준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인정받았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사적 제 117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이다. 조선 시대의 최대의 궁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문화가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경복궁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가낙산과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경복궁의 문들 중에서 유일하게 흥인지문만 4글자로 되어 있는데,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여기운을 북돋기 위해지(之)자를 넣었다. 현판과 궁궐의 위치를 잡는데에 풍수지리 사상을 배경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오늘 날에는 대부분 남향으로 건물을 짓는데, 어느정도는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시대 상황에 따라서도 약간은 변형되어 자리 잡혀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복궁에는 많은 동물들의 석상이 있는데, 근정전을 지키는 12지신과 사신들의 석상이 있다. 북현무, 우백호, 좌청룡, 남주작인데, 궁을 균형있게 수호하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 날로 따지면 도어락이나 CCTV의 느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금천교를 반드시 지나야 하는데, 관리들이 다리를 건너올 때,
조선시대에는 유독 지리와 지리서에 관심이 많았다.이에 따른 많은 지리서들이 등장하게 된다. 조선 시대의 지리서들은 크게 조선 전기의 지리서와 조선 후기의 지리서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지리서들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관찬 지리지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주로 국가 통치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중심으로 제작 되어 국가의 연혁, 강역, 산물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자료를 항목별로 묶어 백과사전식 나열과, 개략적이고 관념적인 서술, 중국 중심의 세계관인 중화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에 반해서, 조선 후기의 지리서들은 중화사상에서 탈피하고 자주적이며 실용적인 학풍을 중대하였고, 사찬지리지와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편찬되었다. 특정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주관적, 설명식 서술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시대 상황에 따라서 같은 물건을 만드는 데에도 다양한 방식과 가치관이 개입되는데, 오늘날과 과거를 비교하여도 차이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과거에는 주변 자연환경을 중심적으로 관찰했다면, 오늘날은 주변 인문적 환경이 어떤지, 교통이 편리하고 재화와 서비스 능력을 충
현충일이 대략 일주일 정도남았다. 현충일은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기리는 날이다. 6월 6일로,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있다. 한국은광복 이후 남과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념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다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서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 자산 등을 잃었고 남과북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40만명 이상의 국군이 사망하였고 100만에 달하는 일반 시민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고1953년휴전에 들어갔다. 나라의 상황이 어느정도 회복하였고 대한민국은 1956년 4월 대통령령 제 1145호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 을 개정하여 매년 6월 6일을 현충기념일공휴일로 결정하였다. 이후1975년 12월에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이 개정되어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몇몇사람들은현충일을 한국전쟁에서 국토방위에 힘쓴 국군만을 위한 날이라고생각하지만, 우리 국군뿐만아니라 우리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의 넋을 기리는 날이다. 현충일과 같이조의를 표하는 날에는 국기를 게양할 때깃면의 세로만큼을 내려서 달아야한다. 현충일날 당일에는 오전
한옥은 우리나라 전통가옥으로 각 지방이나 기후에 따라서 가옥의 형태나 구조가 달라진다. 남부지방의 한옥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에 해당하는 남부지방의 한옥은 부엌, 방, 대청이 일자형으로 구성되어 지붕의 모습이 'ㅡ' 자의 형태를 갖고있다. 이는 남부지역 특성상 무더운 여름에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끔 구성된 모습이다. 중부지방의 한옥 중부지방 한옥의 형태는 대부분이 'ㄱ' 자로 지어졌고 'ㅁ' 자의 형태의 가옥도 나타난다. 이는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중간에 위치해서이다. 개성중심의 지역에서는 부엌과 안방을 남쪽에 배치하여 해가 잘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서울의 경우는 부엌이 대부분 꺽인 곳으로 오게되어 동서쪽에 위치한다. 북부지방의 한옥 북부지방에 위치한 한옥의 경우에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바람을 잘 차단하는 형태인 'ㅁ' 자의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방과 방을 직접 연결하여 마루나 복도가 없어 겨울철 추위를 막아준다.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정주간은 부엌과의 사이에 벽이 없어 부엌일을 하거나 가족들의 사 또는 휴식 등 지금의 거실과 같은 역할을 했다. 정주간에는 온돌을 놓아 추위를 견뎠다.
우리나라의 탈춤은 여러가지 유래 설이 존재하지만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탈춤은 공연자와 관객이 한 마당에서 함께 어울려 즐기는 전통놀이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탈을 쓰고 평소에 말하지 못했던 한과 분을 풀어내고 못마땅한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였다. 탈춤은 초기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지만 나중에는 양반들도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탈춤도 지역마다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탈춤 중 하나인 봉산탈춤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군에서 전승되던 탈춤으로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굿거리 장단이 사용된다. 봉산 탈춤의 특징은 각 과장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독립적인 성격이 나타나며, 언어유희나 열거, 대구, 익살, 과장 등을 통해 양반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또한 서민층에서 양반층까지 즐겼던 놀이였기 때문에 서민 계층의 언어와 양반 계층의 언어가 함께 사용되고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말뚝이, 샌님, 서방님, 도련님, 취발이 등의 탈을 쓰고 하며 익살과 웃음을 유발하며 현실을 풍자한다. 봉산 탈춤은 1과장부터 7과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