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용의 영화 칼럼] 잊지 못 하는 동물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삶은 우리에게 매 순간 질문을 던진다. 삶 앞에 서서 누군가는 여행에서, 누군가는 문학에서, 누군가는 음악에서 얻은 답으로 인생의 질문들에 대한 빈칸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도 인생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다.

 

That's how we live: never let leave. 우리는 아무것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살아간다. 영화에선 과거를 극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리도 무신경해 보이지만 그의 고요함에는 간헐적으로 파도가 찾아온다. 그럴 때면 리는 고통에 침잠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며. 마치 몸부림칠수록 올가미는 더 빨리 죄어옴을 아는 한 마리의 이리처럼. 리의 조카 패트릭도, 아버지의 죽음에 무덤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 고통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다. 아이스하키 선수인 패트릭은 냉동실에서 냉동 닭을 꺼내다가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아버지를 떠올려버린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아이처럼 여린 울음을 터뜨린다. 재혼 이후 목가적으로 변한 패트릭의 어머니도 다시 만난 패트릭에게 교양있는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끝끝내 눈물을 흘린다. 리의 전 아내인 랜디도, 다시 유모차를 몰며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듯 보이지만, 리를 만나 그동안 마음속 깊숙이 담아뒀던 과거를 떠올리며 무너져 내린다.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했다. 단 한 장면에서만 나온, 리의 아버지와 절친했던 노인도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그 나이까지 잊지 못했다. 화창한 날,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이 장면은 특히 의미가 있는데, 엔딩이 임박하여 등장하는 장면이고 따라서 결국 과거를 극복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영화가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플래시백은 파편화 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신 scene의 중간에 불쑥 튀어나온다는 점에서도 파편이다. 이는 마치 불쑥 떠오르는 기억 같다. 이러한 비연속적이고 동기 부여되지 않은, 불규칙한 컷 편집은 ‘네 멋대로 해라’를 연상시킨다. 두 영화에서는 모두 고전 할리우드의 연속 편집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써 사람의 의식을 표현하였다. 카메라의 가운데에 리를 미디엄 샷이나 클로즈업으로 담는 초반부에 주로 이런 파편화의 빈도가 높고, 이는 리의 의식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평이하다. 영화의 바다에는 파도가 거의 없다. 그래도 간간이 파도치는 바다가 나오지만 -사실 고요함과 고요함 사이에 파도가 있는 것인지, 파도와 파도 사이에 고요함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다는 언제나 다시 고요해진다. 결국 파도와 고요함 모두 바다이고 존재할 뿐이다. 파도라는 역경도 흘러간다. 하지만 파도는 한 번 밀려오면 영원히, 바다라는 이름 안에 존재한다.

 

초반에 나온 푸른색, 화재의 노란색과 붉은색의 모티프가 활용이 많이 안 됐다. 다만 잡담이 생기면서 여러 색과 섞여 좀 더 밝은 칙칙한 색으로 중화됐을 뿐이었다. 푸른색은 리의 색이자 바다의 색이었다. 실제로 그의 직업인 블루칼라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우울을 보여주기도 한다. 라이팅도 청조를 띄었다. 그런데 이후엔 리도 파란색을 벗는다. 칙칙한 녹색, 정장의 검정과 흰색이 리의 색깔이 된다. 결국 모티프도 흘러간 건가. 흘러감의 일부. 이외에도 몇몇 모티프가 미완이라고 느껴졌는데, 그것도 결국 '완결되는 것 없이 흘러갈 뿐인 인생'이라는 주제에 봉사하는 것일까.

 

이런 고요함과 흘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감독은 2시간 이상의 러닝타임을 할애했다고 볼 수 있다(‘보이후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단지 흘러가는 것.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회복도 없다. 흉터로 남지 않는 상처는 없다.

 

이렇듯 영화는 삶은 흘러가는 것이고, 과거는 잊히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거는 언제나 오늘의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영화에서는 말하지 않은 삶에 대한 대답을 하나 덧붙여 보자면, 결국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추억으로서 사랑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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