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선을 넘는 즐거움

 

 

 

이공계열과 인문계열, 문화예술계열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망망대해에 고립되어 있는 섬들처럼 서로 간섭하지 않은 채로 각자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인터넷을 찾아보다 보면 인문계, 이공계, 문화예술계가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문계, 이공계, 문화예술계의 경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경계를 넘어 여러 학문들이 융합했을 때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온다. 과학이 다른 학문들과 융합함으로써 이루어낸 성과들을 알아보자.

 

이공계와 인문계의 결합은 생각보다 흔히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로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자주 보이는 과학교양서들이 있다. 이러한 과학교양서들 중에는 전공서적을 방불케 하는 정보전달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책들도 있는 반면, 읽다보면 과학책을 읽는건지 시를 읽는건지 헷갈리는 책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대표작인 ‘코스모스’가 있다. 코스모스의 서평을 보면 ‘따뜻한 과학책이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등의 내용이 많다. 실제로 코스모스를 살펴보면 시적인 문체와 풍부한 과학적 사실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책의 내용이 과학의 범주 안에서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것 역시 코스모스의 특징이다. 과학적 사실들과 사회학적인 통찰, 시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코스모스라는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과학교양서들도 마찬가지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 따뜻한 문체로 과학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책 등 과학적 지식만이 아닌 시적인 표현과 철학적 질문까지도 망라하는 책들이 많다.

 

이러한 과학교양서들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문학과 과학이 서로 섞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능력과 글을 쓰는 능력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과 과학으로도 시를 쓸 수 있고, 시를 통해 과학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과학과 다른 학문 분야 간의 협력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이를 통해 과학이라는 학문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도 한다. 필자의 경우 책을 읽다가 수식이 나오는 경우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그러나 과학교양서의 경우 수식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책들도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수식이 없는 과학책들은 필자가 과학에 거부감을 갖지 않고 과학의 신비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로를 통해 과학이라는 학문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과학과 문학의 만남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예술적인 능력이 과학적 발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갈릴레오의 발견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갈릴레오는 직접 만든 망원경을 통해 달을 관찰했고, 달에 요철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달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깨부순 발견이었다. 갈릴레오가 달을 관측하기 전까지는 달은 마치 유리구슬 같은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달은 불완전한 지구와 완전한 천체들 사이의 경계였고, 사람들은 지상과 천상에서는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관측결과는 이러한 통념을 깨부쉈다. 그는 달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더불어 과학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역할을 해냈다.

 

이 이야기와 예술적인 능력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또 다른 천문학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갈릴레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천문학자 중 토마스 해리엇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갈릴레오보다 먼저 망원경을 통해 달을 관측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달에도 지형이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달에 지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해리엇보다 늦게 출발한 갈릴레오였다. 이 두 사람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갈릴레오에게는 회화와 빛의 작용, 그림자의 생성 등에 관한 지식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피렌체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갈릴레오가 이때 얻은 예술적 소양은 이후 그를 위대한 과학자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감정과 충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과 이성과 논리적 증명만을 받아들이는 과학은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인다. 갈릴레오의 예시는 이러한 생각이 그저 편견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오히려 과학과 예술은 3D 안경의 양쪽 렌즈와 비슷하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시각이 합쳐지면 제 3의 결과물이 나온다. 이렇게 나온 파격적인 결과물들은 갈릴레오가 세계사에서 신이라는 베일을 거두고 과학혁명을 시작했던 것처럼 세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간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과학과 철학의 협력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며 인공지능 윤리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는 탓이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인간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던 철학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공지능 윤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인간이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와 규범들에 관해 토론하던 철학이 0과1로 번역되어서 인공지능에 프로그래밍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 토론하던 철학자들은 자율주행 자동차가 사고를 냈을 때 책임의 소재, 인공지능이 지켜야 할 규칙들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인공지능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문학과 예술에 의해 과학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처럼, 이러한 경우 과학에 의해 철학의 경계가 넓어진다. 과학과 철학 사이의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학의 발전은 주기적으로 철학자들에게 토론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과학자들이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밝혀내자 동물권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인터넷이 발달하자 인터넷 윤리에 관한 토론이 불거졌다. 과학자들이 발전된 기술을 철학의 영역에 내려놓으면 철학자들은 현재 사회에 맞는 도덕과 윤리를 정립하기 위해 토론한다. 이렇게 토론을 통해 정립된 기준들은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와 과학자들이 지켜야 하는 연구윤리가 되고,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에 대한 올바른 사용설명서가 된다.

 

이 외에도 과학을 통해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사회생물학 등의 새로운 학문분야가 생겨나기도 하고,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점묘법 등의 미술 기법이 나타나기도 한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에서 조경수역이 형성되며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듯이, 학문과 학문의 경계선에서는 새로운 생각들이 끊임없이 싹튼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생각들 중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최근 사회가 한 분야에만 능통한 인재보다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이를 한데 엮을 수 있는 T자형 인재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2 학문과 학문 사이의 경계가 무너질 때 새로운 생각이 생겨난다.

 

집합 A와 집합 B의 합은 {A+B}보다 크거나 같다. 학문은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파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연철학, 인문학, 그리고 예술이 한데 모여 협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대인관계에서와 달리 학문과 학문 간의 교류에서는 서로가 선을 넘을 때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난다. 과학은 경계를 허물고 다른 학문과 결합했을 때 특히 눈부신 성과를 내는 학문이다.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었을 때 일어나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는 것. 가히 선을 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참고 및 인용 출처

1. 참조_ https://www.youtube.com/watch?v=xm_7mm1-r_Y&t=277s

2.참조_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806210955157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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