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宗敎)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세상의 많은 가르침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의 의미인Siddhanta Desana이라는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종교용어이다. 이후 서양의Religion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게 되면서 현대의 의미를 갖췄다. 현대 의미에서 종교는 신적 존재를 숭배하고 추종하며,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하나의 문화 체계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사회주의를 집대성한 카를 마르크스가 헤겔의 저서인 ‘법철학 강요’를 비평하면서 남긴 문구이다. 그 당시 아편은 널리 퍼진 마약이었으나, 동시에 진통제였다. 겨우 삶을 꾸려가는 노동자나 서민에게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다른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게 하고, 현 상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좌초시켰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천상의 소망을 품게 하며 현실의 고통을 ‘마취’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진통제 대신 ‘아편’이라는 단어에 종교라는 의미를 담았다. (참조=https://www.asiae.co.kr/article/2016120513584578025) ‘the Chimney Sweeper’라는 시에서, 어린 굴뚝 청소부들은 몸조차 제대로 가눌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우리는 저마다 다른 모습, 저마다 다른 역할로서 사회에 속해 있다. 또한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주체적인 구성원이기 때문에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이러한 의무는 비단 국가라는 거대한 사회뿐 아니라, 가족, 학교, 직장 등 여러 작은 공동체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급식 실무사님들께서 업무를 이행하지 않은 순간을 상상해보라. ‘급식’이라는 학교의 기능이 정지되어 학교라는 공동체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즉, 어느 분야든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특정 기능이 정지되어 사회가 마비되고 운영에 차질이 발생한다. 시 '참회록' 속에서 화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반복되는 참회를 하고 있다. 본문을 바탕으로 추측해보면 푸른 녹이 슬어 형체도 잘 보이지 않는 거울 속에서 본 자신의 모습이 욕되어 보였기 때문이다(1연). 그렇다면 화자가 느낀 그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이는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를 참회하는 모습(2연, 3연)을 미루어보아,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Advocatus Diaboli), 가톨릭교회에서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과정 중 그릇된 추대를 막기 위해 시성 반대를 고수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시성 청원인들은 악마의 대변인에 맞서 시성 대상자를 방어해야 한다. 대개는 가톨릭교회 사제들이 이 직책을 수행하지만, 세속 학자나 무신론자에 의해 수행되기도 한다. 일례로, 테레사 수녀의 시성을 앞두고 당대 무신론자의 대표 격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악마의 대변인을 수행했다. (참조= 성인 테레사 수녀, '또다른 얼굴' 주장 왜 자꾸 나오나, 아시아경제, 2016.09.07. 김희윤 https://www.asiae.co.kr/article/2016090516014691616) 이러한 악마의 대변인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고의로 반대를 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일방적인 처리가 불가능하도록, 일방적 처리로 인한 부작용을 예방하도록 마련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저서인 ‘자유론’에서 주창한 반론의 자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반증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시점, 혹은 그 이전부터 전쟁은 계속되었다. 혹자는 전쟁의 표면적 방식, 혹은 양상이 변화하였을지는 몰라도, 전쟁 자체는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소규모의 무력충돌부터 심각한 수준의 사상자를 낸 전쟁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전쟁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 7월 15일 자 외교부의 여행 금지 국가 목록에 따르면, 총 7개국 중 6개국(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리비아, 소말리아 등)이 전쟁(혹은 내전)으로 인해 여행 금지 국가로 선포되었다.해당 6개국의 전쟁(혹은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는 4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대한민국도 휴전 상태에 놓여 있다.(대한민국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누리집. 참조. http://www.0404.go.kr/dev/issue_current.mofa?level=ban) 이렇게 계속되는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인류는 전시국제법(전쟁법, 국제인도법)을 마련하고 유지, 개선했다. 인도주의 정신에 의해 맺어진 전시국제법은 전쟁 중 각 국가의 행위를 제한하고, 민간인의 자유 및 권익, 생명 보전을
“인쇄술의 발명으로 여론조작이 쉬워졌고, 영화와 라디오는 이것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텔레비전이 발전하고 기계가 송수신을 동시에 가능케 해줌에 따라 사생활은 끝났다.” 소설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혹은 에릭 아서 블레어)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정보통신기술이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그 발전에 발맞추어 계속해서 벌어지는 정보의 격차는 지식의 격차, 권력의 격차를 일으켰다.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감시와 통제는 권력 관계를 만들어냈고, 우리의 사생활은 철저히 침해받았다. 결국, 정보사회는 감시사회가 되었고, 우리 시대의 파놉티콘이 형성되었다. 파놉티콘(panopticon)은 본래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한 형태를 의미했다.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의미하는 ‘pan’과 ‘보다’를 의미하는 ‘opticon’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이다. 파놉티콘은 흔히 ‘원형 감옥’ 또는 ‘일망 감시시설’이라고도 불린다.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수감자들의 독방을 원형으로 둘러싸듯 배치하여 최소한의 비용과 관리만을 취하도록 감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구조이다. 감시자들이 교도소의 중심에 위치하여 외곽에 둘러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일상의 파탄을 극복하고 대응하기 위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가 만들어졌다. 중대본은 코로나19의 극복을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 생활 속 거리 두기 등 여러 대책을 마련했고, 음주가무飮酒歌舞나 지인재회知人再會 등 일상의 여러 행위가 제한되었다. 총 45일의 사회적 거리 두기와 이후 계속된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인해, 연일 확진자 증가폭은 줄어갔고, 곧 코로나19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참고+최윤나,文대통령 “중대본 100일, 여러분 있기에 국민들은 안심”, 동아일보(인터넷), 2020. 05. 05. 0면.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505/100911161/2, 박채영,‘사회적 거리두기’ 45일, 하루 평균 코로나19 확진자 100명→9명, 경향신문(인터넷), 2020. 05.05., 0면.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5051852001) 그러나 이 같은 기대는 지친 이들의 단비로만 알았던 최대 6일간의 황금연휴로 인해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확진자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을 정의하며 설명하는 단락의 첫 문장이다. 인류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등을 거치면서 점차 이성과 합리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아성(牙城)에 부합하지 않는 부류는 철저히 배척하며 타도하고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할 존재로 여겼다. Enlightenment의 어원인 ‘빛을 비추는 일’에서도 알 수 있듯, 인류는 지금까지 우매한 야만인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위 인지-도구적 합리성의 지배 아래에서 우리는 지금껏 계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사명감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이들이 등장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바로 좋은 예시이다. 그들은 “계몽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다.”라며 계몽에 대한 완전히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즉, 계몽이란 주체가 객체를 소유하는 주체 중심적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의 문학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말한 변론이자 우리나라의 소설가 김영하의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인용해 역사에 대해 논하려 한다. 구한 말, 일제 강점기로부터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하염없이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고, 진실을 감추려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숨기고자 한 역사는 무엇이었는가.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사학이 유행하였다. 조선은 미개하여 일본이 나서서 근대화, 개화를 이뤄야 한다는 논리에서 시작한 사학 풍조였다. 이는 조선이 스스로 개화할 수 있음에도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국권을 찬탈하였다는 자신들의 과오를 정당화하고 덮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왜곡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역사 왜곡은 우리 민족 내부에서도 발생한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 검인정 교과서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권력가들은 자신들의 국민을 우롱하고, 사상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정화했으며, 자신들의 정권을 옹호하려 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3차 교육과정은 516쿠데타를 5월 혁명으로, 10월 유신을 ‘농촌의 근대화와 국민의 정신 혁명
헌법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에서 제작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에 관한 각종 근본 법규의 총체. 모든 국가의 법의 체계적 기초로서 국가의 조직, 구성 및 작용에 관한 근본 법이며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한 국가의 최고 법규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전적인 의미이고,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헌법은 이 멋들어진 그럴듯한 문장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헌법은 ‘조력자’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헌법은 쉽게 말해 ‘우리를 위한 법’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보면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권리, 특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우리의 특권 등을 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이러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국가와 정부는 무엇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의무는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그대로 나열한 것이 바로 헌법이다. 즉 헌법은 말 그대로 국민 친화적, 약자 친화적인 삶의 조력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력자를 악용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독재자 중 일부는 버젓이 자리 잡은 헌법을 통해 권력을 손에 쥔 사례가 더러 있다. 예를 들
‘爱애’, ‘あい’, ‘Amor’, ‘Liebe’, ‘L'amour’, 모두 ‘사랑’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언어의 형태이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개념은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누구나 느끼고, 공유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지속되어 온 사랑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500년 전 사상가인 공자는 평생을 유랑하면서 ‘仁인’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仁인’은 사랑을 뜻하는데, 그 형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人인’과 ‘二이’가 결합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두 사람 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를 따라 ‘仁인’의 유래를 좇다보면 원래의 의미는 ‘임신한 여성이 태아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자식 사랑’이라는 마음이 발전하여 ‘인간애’의 개념으로 확장된 것이 공자의 ‘仁인’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242년 동안 483번의 전쟁이 발발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공자는 인간애를 통해 갈등을 딛고 도덕적 이상사회인 대동사회를 이룩하려 한 것이다. 공자는 가족, 친척과 같은 작은 범위에서 출발한 사랑을 주장한 반면, 묵자는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언론)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뉴스(언론)는 공적인 삶의 풍조를 조성하고 우리 각자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힘이다. 뉴스(언론)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만드는 으뜸가는 창조가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언론)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는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서문 중 일부이다. 이처럼 언론은 사회가 근대화함에 따라 강력한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힘은 언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말하기의 의미’에 따르면 언어활동은 상징적인 층위에서 행사되는 일종의 폭력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달리 언어는 대화 상황에서 상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폭력성을 지닌다. 우리는 흔히 ‘말 속의 뼈’를 주장하곤 한다. 즉, 언어는 경우에 따라 특정인을 공격할 수도,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는 물리적 폭력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쉽게 폭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폭력에 대항하는 상반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이 지배질서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
연일 나라 안팎이 혼란스럽다. 뉴스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구한말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한일 갈등, 러시아의 영공 침범, 북한의 도발, 목선 남하 등 매일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고, 그 이슈에 대한 기사가 쏟아진다. 그 중 일부 언론의 기사들은 보기 좋게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언론言論,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즉, 사회 전반의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세상을 보는 눈이다. 대부분 일개 사기업일 뿐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기도 하다. 이 권력은 프레이밍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우리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어떤 기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잘 요약된 단 하나의 문장은 기사의 제목이다. 해당 기사의 성격, 기사를 통해 말히고자 하는 것이 가장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목은 프레이밍을 시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다. 누구나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기에 어느 언론사나 기사를 작성하는 논조가 있기 마련이다. 그 논조 자체를 규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고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부모형제관계나 교우관계, 사제관계 등이 그 예시이다. 그리고 그 관계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목적’과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그 중 ‘목적’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득실의 계산 없이 그 자체로서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상대를 ‘목적’보다 ‘수단’적 존재로만 치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에게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되는 관계는 애초에 생성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관계도 허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이득이 존재하는 이른바 ‘비즈니스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얕고 허약한, 쉬이 끊기는 관계는 사회 전반적으로 불신의 풍토를 조장하고, 경쟁만이 존재하는 ‘무한 이기주의’의 소용돌이로 개인들을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소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
“펜은 칼보다 강하다.”, 우리가 언론의 강력함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관용표현이다. 저 말처럼 언론의 힘은 강력하다. 10년 전,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은 평생 언론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강력한 선례로 남았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언론 앞에 무릎 꿇는 결과를 낳았다. 자신들의 힘을 너무나 잘 아는 언론은 권력자들과 손잡고 그들을 추앙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더러운 면모를 손수 가리고 ‘신’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언론은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았고, 킹메이커로서 우리의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