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현의 정치/시사 칼럼 13] 근본적인 가르침

 

 

종교(宗敎)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세상의 많은 가르침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의 의미인 Siddhanta Desana이라는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종교용어이다.  이후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게 되면서 현대의 의미를 갖췄다. 현대 의미에서 종교는 신적 존재를 숭배하고 추종하며,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하나의 문화 체계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사회주의를 집대성한 카를 마르크스가 헤겔의 저서인 ‘법철학 강요’를 비평하면서 남긴 문구이다. 그 당시 아편은 널리 퍼진 마약이었으나, 동시에 진통제였다. 겨우 삶을 꾸려가는 노동자나 서민에게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다른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게 하고, 현 상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좌초시켰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천상의 소망을 품게 하며 현실의 고통을 ‘마취’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진통제 대신 ‘아편’이라는 단어에 종교라는 의미를 담았다. (참조=https://www.asiae.co.kr/article/2016120513584578025)

 

‘the Chimney Sweeper’라는 시에서, 어린 굴뚝 청소부들은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굴뚝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종교는 그들의 부당한 노동을 합리화했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도구로서 어김없이 작용했다. 하늘 상급을 기대하면서, 창조주이자 절대자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노고를 받아들이고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참조=윌리엄 블레이크, the Chimney Sweeper)

 

이러한 종교의 모순적 양상은 제국주의의 망령이 지구를 뒤덮은 시기에도 뚜렷이 드러났다. '선교 사역'이라는 거창한 명목아래,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미개한 지역에 침투했다. 종교적 침투는 곧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 침투로 변질되었고, 해당 지역을 자신의 식민지로 잠식했다. 종교가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지금까지 카를 마르크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종교가 남용된 두 사례를 살펴보았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종교가 그 본질에서 벗어나 특정 집단의 이익 추구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서양의 주류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의 관점에서, 절대자이자 조물주인 예수는 항상 소외된 이웃과 함께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구절처럼, 종교는 이웃의 고통을 정당화하거나 이용하지 말고, 도리어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종교는 더 이상 아편이 아니라, 방패막으로 작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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